[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삼일절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친일행위로 얼룩진 조선의 풍경을 그린 연극 한 편이 눈에 띈다. 과거에 대한 반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현재 모습을 돌아보는 연극 <왕벌의 비행>이 그 주인공이다.
이 연극은 1949년 2월 재판정을 배경으로 삼고, 해방 후 제정됐던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거해 대표적 친일파인 배정자에 대해 벌어졌던 재판을 무대에서 재현한다. 일종의 다큐멘터리 연극인 셈이다. 작품은 '개정', '이토', '증인', '고종', '위안부', '판결' 등 총 6장으로 구성돼 있다. 장과 장 사이에 영상으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설명을 담아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배정자는 친일행위와 밀정을 통해 조국을 배신한 인물이자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각시탈> 중 채홍주가 바로 배정자를 모티브로 만든 인물이다.
미모를 무기로 한 시대를 풍미했으나 무대 위 재판정에 불려나온 그녀는 살 날이 얼마남지 않은 일개 노파다. 자신의 과오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어수선한 시국이 나를 만들었다'고 변호할 뿐이다. 판사 앞에 선 검사와 변호사는 배정자를 둘러싸고 각각 다른 주장을 펼친다. '나라를 팔아넘긴 일본 앞잡이이니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검사의 주장과 '일개 개인이 시대의 아픔을 안은 것이니 용서해야 한다'는 변호사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린다.
검사와 변호사가 대립각을 세울수록 관객이 느끼는 아이러니의 강도도 세진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배정자는 응당 처벌받아 마땅할 터이지만 실제 역사가 그렇게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품을 통해 작가 류범순이 던지는 돌직구는 2013년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한, 뼈 아픈 질문이다.
배정자란 인물이 지닌 양면성은 2인 1역의 설정으로 극대화된다. 재판정의 피고인 석에는 배우 두 명이 자리한다. 어릴 적 이름인 배분남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기모노 차림이고, 나이 든 배정자는 한복을 입고 있다. 두 배우를 통해 과거의 인물인 배정자는 관객에게 보다 입체적인 인물로 살아 숨쉬게 된다. 다만 배정자 외에 검사 역을 2인 1역으로 연기한 이유가 분명치 않아 아쉽다.
내용과 형식의 결이 상충된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블랙 코미디를 표방하는 이 작품에서는 배우들의 동작이 마치 느린 화면처럼 극 중간중간 펼쳐진다. 이 같은 설정은 극에 리듬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지만, 극의 말하고자 하는바를 전달하는데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유머러스한 동작은 극의 무게감을 덜어내는 역할에 그칠 뿐이다.
전반적으로 민족주의적 성향이 다분하지만 작품의 문제의식만큼은 과거사 청산을 생략한 역사 때문에 신음하는 우리에게 여전히 울림을 준다. '달콤함을 쫓는 왕벌', 조선의 '마타 하리' 배정자의 무대 위 현현은 마치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곡 '왕벌의 비행'처럼 관객의 머릿속에 잡음처럼 윙윙댄다.
작 류범순, 연출 류성철, 제작 극단 신기루만화경, 출연 김은희, 하치성, 이소희, 조아라, 전익수, 김석기, 3월 10일까지 소극장 키작은 소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