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전재욱기자] 김진태 대검찰청 차장(61·사법연수원 14기·사진)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관련해 "관여하지 않은 것을 홍복(洪福)으로 생각한다"고 1일 소회를 털어놨다.
퇴임을 이틀 앞둔 김 차장은 이날 검찰 내부 통신망인 이프로스(e-Pros)에 '검찰을 떠나면서'라는 글을 띄우고 "상대방이 생명을 버리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비난을 받은 적은 별로 기억이 없는 것 같아 그나마 큰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며 이렇게 밝혔다.
김 차장은 "이렇게 자위한다고 해서 서른해 가까이 쌓은 죄업이 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범죄를 단죄한다고 했지만 당사자나 그 가족이 받았을 고통이나 충격을 얼마나 제대로 헤아렸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김 차장은 충무공 이순신의 말을 빌려 "'사나이가 세상에 태어나 쓰이면 목숨을 바쳐 충성할 것이요. 쓰이지 못하면 밭 갈면 족하거늘 권세있는 자에게 알랑거려 뜬 구름같은 영화를 훔치는 것은 나에게 수치다'는 기개를 흉내내려고 했다"면서도 "솔직히 말씀드려 재직기간 중 스물 몇 번이나 받은 인사 중에서 마음속 깊이 승복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지난해 대선 당시 심경을 밝히면서 "대통령 선거일 전 이틀간은 하루가 삼년(一日如三秋)이라는 옛사람의 말이 과언이 아님을 실감했다"며 "지나고 보니 단 하루도 총장이 되지 못할 사람이 마치 천년이나 할 것 같은 근심을 지니고 지내 스스로도 부끄러울 따름"이라고 돌아봤다.
김 차장은 "'뒷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눈 내리는 길마저 함부로 걷지 말라'(踏雪野中去 不順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던 서산스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실천했는지는 여러분의 평가에 달렸다. 趙翼(조익) 같은 명사도 자기 뜻대로 이뤄진 게 3할 남짓이라고 했는데(到老方知非力取 三分人事七分天) 저 같은 범인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라고 덧붙였다.
이하 전문.
검찰을 떠나면서
검찰가족 여러분!
저도 이제 정든 검찰을 떠납니다.
而立의 나이에 법조에 입문하여 杖鄕을 받을 때까지 검찰에 있었으니, 시간적으로도 적지 않은 세월이었고 저 개인적으로는 젊음을 송두리째 바친 기간이었습니다.
1985년 1월 밤을 새워 달려간 기차를 타고 새벽에 도착한 사고무친의 순천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한 이래 오늘 대검찰청 차장검사로서 검찰총장 직무대행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이 순간까지 무려 28년 2개월 여를 단 하루도 검찰을 떠나지 아니한 채 제게주어진 책무를 다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지내왔습니다.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인천, 대구, 대전, 청주, 강릉, 순천 등 경향각지에서 인간적인 정리도 맺고 지역의 문물을 접하는 망외의 기쁨도 누렸습니다만 마음 속으로는 늘 공직자의 자세와 책임에 짖눌려 지냈습니다.
조급한 성정에 일처리에만 급급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고 요구사항만 늘어놓다보니 후배들에겐 점점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선배가 되어 갔으며, 선비의 자세를 본 받아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귀고 어울리는 것 마저 멀리하면서 내색조차 제대로 하지 아니하다 보니 정마저 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욕심만은 언제나 현실을 넘어선 데다가 둔한 천성에 노력마저 부족하여 결과적으로는 하는 일마다 후회가 뒤따르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막상 떠나려고 하니 아쉬움과 미안함이 앞을 가립니다.
몇 가지 어슬픈 변명으로나마 여러분의 너그러운 이해와 용서를 구하면서 검찰을 떠나는 작별인사에 갈음하고자 합니다.
검찰에서의 생활은 누구나 그렇듯이 보람된 순간도 있었고 아쉬운 때도 있었습니다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과없이 지내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동료·선후배 검사, 수사관, 실무관 등 검찰가족 여러분의 도움과 성원 덕분이었습니다.
겸사나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라 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입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다소라도 조직이나 나라에 도움이 된 게 있다면 이는 여러분의 덕분이며, 거듭 감사드립니다.
저는 검사생활을 하면서 順理, 謙虛, 積善이라는 세가지 명구를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순리에 따름으로써 하늘의 도움을 받고(天之所助者 順也),
겸허함으로써 유종의 미를 얻으며(謙亨 君子 有終),
적선하여 악업의 일부라도 녹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상관없이 저의 검사생활은 참으로 인고의 세월이었습니다. 늘 해는 이미 서산에 기웃기웃하는데 맡은 일은 무겁고결과는 아득했습니다.(日暮任重道遠)
능력에 비해 일 복은 많아 재직기간 내내 크고 작은 일에 빠져 지냈습니다. 특히 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에 검찰이 수행한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일에는 저의 능력이나 일의 성격에 상관없이 거의 대부분 불려다녔습니다.
전직대통령, 현직 대통령 아들, 국회의원, 고위공직자, 재벌총수 등등....
노조 추진 위원장 납치, 음란물 제작, 인신매매 등등....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내려 앉아도....
주가조작, 환치기, 금융비리 등 본격적인 경제사범 수사의 개척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그렇지만 문제가 터져야 불러가게 되어 위기에 처해야 겨우 존재를 인정받는다는 찬사인지, 위로인지 하는 말을 듣고 지냈습니다.
일은 한다고 했지만 늘 공은 거의 없었고 허명만 조금씩 쌓여 갔습니다. 게다가 소심한 성격에 지혜마저 부족하여 사안의 깊은 정상을 제대로 헤아리기 어려울 때는 법과 원칙에 의지한 처리라도 고집하다보니 융통성없는 인간으로 비쳐졌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별다른 검증도 없이 화석처럼 굳어져 버렸습니다.
밖에서 어떻게 평가하든 저 개인적으로는 늘 부족한 능력을 뼈저리게 느꼈고, 그래서 다른 사람이 한 번 생각할 때 두 번 생각하고, 한 시간 투자할 때 두 시간 투자하면서 궁리하고 고민했으며, 실체를 제대로 밝히지 못할까, 무슨 사고라도 일어날까, 비판이나 비난이 쏟아지는 것은 아닌가 노심초사하며 불면의 밤을 지새웠습니다.
주위에서 지켜보는 가족들 역시 영문도 제대로 모른 채 함께 숨죽이고 초조와 불안의 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는 누구든 부여받은 사명이 있을 터인데 단죄한다는 명목으로 제가 함부로 중간에서 자르는 것은 아닌가 수없이 번민했으며 신의 도움을 요청한 적도 여러번입니다.
모든 사건처리는 마땅히 법에 부합해야 함은 물론 세상 사는 이치와 사람 사는 정리에도 부합해야, 즉 法·理·情에 모두 부합해야 제대로 된 처리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만 지금와 생각해 보니 이 모든것도 공허한 메아리였던 것 같습니다.
다만, 상대방이 생명을 버리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비난을 받은적은 별로 기억이 없는 것 같아 그나마 큰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이나, 여지껏 사회적으로 크게 비판을 받고 있는 몇몇 사건에는 관여하지 아니한 것을, 옹졸한 이기심이라고 비판할른지 모르지만 홍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자위한다고 하여 서른해 가까이 쌓은 죄업이 사라진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범죄행위를 단죄한다고 했지만 당사자나 그 가족이 받았을 고통이나 충격을 얼마나 제대로 헤아렸겠습니까, 저의 처분에 흔쾌히 승복한 사람이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이리 궁리하고 저리 궁리해도 쌓은 악업이 수미산이니 남은 삶을 설산 카일라스에 가 삼보일배로써 코라를 한들 다 소멸될까요.
집안이 한미한데다가 사귐을 멀리하여 주위마저 없다보니 얄팎한 자존심만 앞세워 충무공 이순신의 "사나이가 세상에 태어나 쓰이면 목숨을 바쳐 충성할 것이요 쓰이지 못하면 밭 갈면 족하거늘 권세있는 자에게 알랑거려서 뜬 구름같은 영화를 훔치는 것은 나에게는 수치로다(丈夫生世 用則效死以忠 不用則耕野足矣 若媚要人竊浮榮 吾恥也)"라는 기개를 흉내내려고 했습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려 재직기간 중 스물 몇 번이나 받은 인사 중 마음 속 깊이 승복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아니했습니다.
전문직인 검사에게 직위가 무슨 대수이겠습니까만 검사장, 고검장에 이어 대검찰청 차장검사로서 검찰총장 직무대행마저 4개월 가까이 했으니 벼슬운도 어지간히 있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이른바'검난'사태, 검사의 피의자 성추문 사태, 부장검사의 수억대 뇌물수수사건 및 개인정보유출에 따른 현직검사에 대한 경찰 수사 등 과거에는 생각조차 어려웠던 사건이나 사태를 처리하거나 수습해야 했습니다.
역대 가장 치열했던 대통령 선거 시에는 어떠한 오해나 개입의 빌미를 주지 아니한 채 관리해야 했고, 검찰 개혁을 최대의 화두로 삼은 대통령 인수위에는 조직의 충격을 최대한 완화시키면서 대응해야 했습니다.
정상적으로 임명된 총장이 그 임기를 다 채워도 경험하기 어려운 희유한 사태들이 이 짧은 기간에 파도처럼 밀려와 망연자실한 적이한 두 번이 아니였으며, 특히 대통령 선거일전 이틀간은 하루가 삼년(一日如三秋)이라는 옛사람의 말이 과언이 아님을 실감했습니다. 인수위에는 참모들과 함께 작은 명예라도 걸어야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단 하루도 총장이 되지 못할 사람이 마치 천 년이나 할 것 같은 근심을 지니고 지내 와 스스로도 부끄러워할 따름입니다.
저는 이제 이 두렵고도 무거운 Damocles의 칼 아래를 떠납니다.
'뒷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눈 내리는 길마저 함부로 걷지 말라'(踏雪野中去 不順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던 서산스님의말씀을 어느 정도 실천했는지는 여러분의 평가에 달렸습니다.
趙翼 같은 명사도 자기 뜻대로 이루어진 게 3할 남짓이라고 했는데(到老方知非力取 三分人事七分天) 저 같은 범인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어찌되었건 그 동안 쌓은 환업이 워낙 두터우니 아무리 노력한들 어떻게 다 털어버리겠습니까만 가슴아픈 일들은 모두 망각의 피안으로 밀쳐버리고 밝고 아름다운 기억만 간직하고 싶습니다.
이제 자유인으로서 갈 곳이, 가보고 싶은 곳이 파노라마처럼 떠 오릅니다.
무소불위의 제왕의 자리마저 박차고 걸림없는 자유를 찾아 떠난 싣달타 태자의 길을,
내 조상의 영혼이 생겨 흘러 왔다던 바이칼 호수가를,
평생을 흠모와비판을 함께 하여 애증이 너무 쌓인 제갈량의 무후사를,
그리고 비장한 희생으로서 인간의 존엄을 숭고하게 보여준 Birkenhead호 영국 수병들이 잠든 케이프타운 앞 바다를 가보고 싶습니다.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보낸 '작은 나무'의 고향마을과 '步步凉心'의 '약희'가 넋으로라도 보고 싶어했던 고비사막의 붉은 노을도 보고 싶습니다.
문득 李淸照의 시 "살아서는 마땅히 사람중의 호걸이 되었고 죽어서도 귀신중의 영웅이 되었네. 이제 와 항우를 그리워하는 것은 강동으로 돌아가길 거부한 것 때문이라네(生當作人傑 死亦爲鬼雄 至今思項羽 不肯過江東)"가 떠 오릅니다.
넋두리가 길었습니다만 잘라 말한다면 기여한 것도 없고, 좋은 선배도 못 되었으며, 제대로 한 일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검찰가족 여러분들만이라도 저의 조그마한 충정을 이해해 주신다면 앞으로의 노정에 큰 위로와 희망이 될 것 같습니다.
검찰가족 여러분!
늘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시고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3. 4.
김진태(대검찰청 차장검사) 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