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차현정기자] 잔뜩 몸을 웅크린 채권시장의 움직임이 심상찮다.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시계제로’ 속에 방향성은 갈피를 잃었다.
지난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의 4월 기준금리 ‘동결’ 결정은 시장의 패닉을 불러왔다. 시장 강세의 한축을 이끌던 기준금리 인하 기대감이 훼손됐으니 시장이 방향성을 잡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불확실한 대내외 여건 속에 강세를 이어갈 이유는 더 이상 찾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2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채권시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자 증권사와 자산운용사의 채권운용역들은 속속 안전을 위해 ‘위기관리모드’로 전환하고 있다.
◇채권 북(Book) 클수록 위기감도 ↑
시장이 실패하더라도 몸집이 크면 클수록 쉽게 죽지 않는다는 ‘대마불사(大馬不死)’ 논리는 역으로 채권시장 위기 요인이 됐다.
“이제 ‘백투더베이직(Back to the basic)’입니다. 기본을 생각해봐야 할 때죠. 특히 채권 북이 큰 대형 증권사일수록 위기감도 큰 상탭니다.” 한 국내 대형 증권사 채권운용 담당 임원의 얘기다.
가장 큰 문제는 고객 운용 북(Book)이다. 채권시장 전반이 위축되면서 증권사가 담고 있는 높은 금리 유치물이 역마진인 경우가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국내 A 자산운용사 채권부문 대표는 “하반기 경기 전망은 엇갈리지만 금리가 오를 것으로 보고 자금 집행을 미룬 곳이 많은 상황”이라며 “하지만 결국 울며겨자먹기로 역마진을 끼고라도 채권을 살 수밖에 없다. 남아도는 자금을 운용하기 위해선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앞서 이달 기준금리를 동결한 한국은행도 금융완화 기조 장기화에 대한 경제 불균형을 우려하면서 증권사나 금융기관의 채권투자가 평가손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향후 금리가 상승 전환할 경우 채권의 평가손 확대와 급격한 자금이동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가손은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채권 값이 장부가격을 하회할 경우 발생한 차액을 말한다.
무엇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은행보다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은 비은행금융기관으로 시중 자금이 유입되고 있고, 보험사와 증권사 환매조건부매매(RP) 계정 등이 유입된 자금을 바탕으로 채권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는 점은 우려를 키우는 대목이다.
현재 기준금리는 2.75%. 지표물인 국고채 3년물의 금리는 2.6%대다.
국내 A 자산운용사 채권부문 대표는 “(채권금리가) 정체돼도 문제고 오르면 더 문제다. 고객 북이 워낙 커졌기 때문”이라며 “보유 중인 고객 북을 줄일 예정이다. 과거 관행대로 했던 매매 패턴을 선제적으로 바꿀 필요는 없지만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가상해서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금리 노출에 민감한 보험사나 연기금 등 엔드유저의 고민은 더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B증권사 채권담당 임원은 “유례없이 보험사나 연기금의 매니저들이 증권사로 직접 찾아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며 “가만히 앉아서 상품을 접수받는 게 일이었던 보험사들이 소싱도 능력이라는 판단에 직접 좋은 물건 선점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예단 어려워..리스크 관리 최우선”
상대적으로 리스크가 큰 대형 증권사들은 일찌감치 비상상태에 접어들었다. 보수적인 시각으로 시장에 대한 방향성을 다시 짜기 시작했다. 불확실한 상황에 예단은 어렵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다.
한 국내 대형 증권사는 최근 관계부서 임원 회의를 열었다. 관련 부서장들이 참여한 이날 회의에서는 일단 포지션을 되도록 줄여 당분간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지난해부터 꾸준히 조직을 축소해온 증권사들은 줄어든 영업인력은 늘리기로 했다. 영업인력 확충에 따른 비용부담은 없다. 기존 채권운용 인력을 채권영업에 동원키로 했기 때문이다.
국내 C대형 증권사 임원은 “돌파구가 없다. 소나기 올 때 피했다가 기회가 오면 잡는 게 우리의 업”이라며 “채권운용 인력의 조직개편을 통해 운용규모를 줄여 손해가 없는 세일즈 인력을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마켓메이킹(Market Making) 활성화 차원에서다.
그는 “듀레이션은 줄여두고 타이밍을 기다리는 게 바람직한 상황”이라며 “그동안 영업인력을 통해 장중 마켓메이킹에 집중하는 등 바탕을 새로 구성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D증권사 채권운용 본부장은 “적어도 한두 달은 채권시장이 불확실이 키운 변동성 내 박스권(2.40~2.70%) 흐름을 유지할 것”이라며 “현재는 초과수요 상태에 있는 상태다. 수요가 채권으로 몰려 금리가 오르면 항상 사는 세력에 의해 수요가 정체되기도 하지만 시장은 항상 적응하기 때문에 큰 변수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돈의 흐름 자체가 단기부동화돼 있다는 점은 우려된다고 했다. 그는 “지금은 유동자금이 단기금융상품인 머니마켓펀드(MMF)나 RP 등에 너무 쏠려있다”며 “미래예측이 어려워졌다는 점이 비교적 장기상품인 채권 투자 유인을 더 어렵게 했다”고 말했다.
한편 수익이 부진한 채권 운용역의 경우 사실상 퇴출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됐다. 증권사의 채권 수익성 악화에 따른 운용역 규모 축소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실제 국내 자산운용사 소속 채권 운용역들이 체감하는 고용 불안은 더욱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E자산운용사 채권운용 담당자 “인력 감원이 이어질 경우 어디로 옮겨갈 수 있을지 뾰족한 답이 없는 상태”라며 “특히 몸값이 높은 시니어 직급에 대한 수요가 줄어 앞으로 이들 인력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올 가능성도 제기된다”고 말했다.
◇통화정책 부담 점증할 듯
이제 시선은 통화당국에 쏠리고 있다. 정부의 스탠스 또한 시장으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신동준 동부증권 연구원은 “정부출범의 지연으로 정책공조의 시동 효과가 나타나는 시점도 다소 늦어지고 있다”며 “경기부양 목적의 추경은 5조3000억원보다 더 확대돼야 하며 대기업과 부동산활성화에 대해서는 일관된 정책조율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기준금리 인하는 직접적인 성장률 제고 효과보다는 정책공조를 통해 민간의 신뢰와 시너지, 정상적 경제활동을 이끌어내는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신 연구원은 평가했다.
정부의 추가경정예산 이슈는 시장에 큰 파장을 미치진 못했다. 지난주 채권시장은 추경 발표에도 불구하고 강세흐름을 보이며 금통위 이후 형성된 약세 흐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슈퍼추경’이라고 불렸던 2009년 당시와 비교했을 때 오히려 국채 순증 규모가 더욱 컸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강세 흐름이 형성된 것이다.
이재승 KB투자증권 연구원은 “시장이 추경을 넘어 강세흐름을 유지한 데에는 경기둔화에 대한 논란이 존재했다고 판단한다”며 “국내 경제 회복력에 대한 확신이 없는 가운데 중국경제 성장세도 둔화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더해지며 양호했던 펀더멘털 판단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중국의 1분기 경제성장률이 7.7%에 그치며 글로벌 경기둔화 우려가 상승한 점이 영향을 준 것으로 이 연구원은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