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기철기자]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의 행방과 관련 '구권(舊券)화폐 비자금'의 존재 가능성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전두환 일가 미납 추징금 특별환수팀(팀장 김형준 부장검사)은 그동안의 압수수색에서 압수해 온 미술품 목록 정리와 회계자료 분석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전씨 일가의 보험료 등에 대한 자료를 보험사들로 받아 분석하는 동시에 22일 부인 이순자씨가 은행에 30억원의 연금예금을 보유 중인 사실을 확인하고 환수절차에 들어갔다.
이런 가운데 검찰이 눈여겨 보는 부분이 전씨가 소유한 구권화폐다. 이 화폐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퇴임 직후인 1994년 1월 이전에 발행된 화폐로 위조방지를 위한 은색 점선이 없는 일만원권을 주로 가리킨다.
◇우리나라 만원권 화폐. 맨 위가 이른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지칭되는 '구권(舊券)'화폐로, 1983년 10월8일 발행되기 시작해 1993년 9월 제작이 중단됐다. 두번째 만원권은 1994년 1월20일부터 발행됐으며 이때부터 만원권 위조를 방지하기 위한 은색띠가 들어가 현재까지 만원권에 표시되어 있다. 그 아래가 2000년 6월19일 발행돼 2005년 제작이 중단된 만원권이며, 맨 아래가 현재 주로 쓰이고 있는 만원권으로 2007년 1월22일부터 발행됐다.(사진출처=한국은행)
최근에는 전씨의 장남 재국씨가 운영 중인 시공사 직원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05년쯤 곰팡이 냄새가 나는 구권화폐로 보너스를 받았다"고 밝힘으로써 구권화폐 비자금의 존재 가능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이 구권화폐 역시 신권을 발행하면서 거래정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권과 똑같이 통용이 가능하다. 지금도 얼마든지 정상적으로 거래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구권 비자금' 사기 미끼로 쓰여
이런 점 때문에 전씨의 구권화폐 비자금의 존재는 그동안 여러 차례 사기사건의 미끼로 사용되어 왔다. 태생부터 불법인 비자금으로,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전씨의 미납추징금이 사회를 어지럽히는 ‘나쁜돈’으로 이용되어 온 것이다.
구권화폐로 남아있는 전 정권 대통령들의 비자금을 신권으로 싸게 바꿔주겠다며 접근해 돈을 가로채는 사기사건이 1990년대 중후반부터 작건 크건 끊이질 않았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들의 천문학적인 비자금 축재와 신권화폐의 역사적인 시기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검, 경이 나서 이들 사기꾼들을 그 때마다 잡아들여 법정에 세웠지만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같은 테마의 사기는 계속됐다.
대구지검 안동지청은 2005년 7월 과거 정권에서 조성한 정치자금이 수조원에서 수십조원대에 이르고 그돈이 현재 창고에 쌓여 있다며 피해자들을 유인해 사기행각을 벌인 사기단 2개조직 9명을 적발해 그중 윤모씨 등 6명을 구속기소하고 1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이들은 2000년 4월부터 전씨 등 전·현직 대통령의 인척관계 또는 정권 실세와의 친분관계를 과시하면서 피해자들에게 접근한 뒤 "전 정권에서 정치자금으로 사용하려고 숨겨둔 구권화폐(비실명자금) 등이 있는데, 이 구권화폐를 교환하는 작업을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으니 투자를 하면 투자원금은 7일내에 돌려주고 투자한 금액에 비례해 이익금을 주겠다"고 속여 구권화폐 교환 작업 명목으로 약 7억원을 가로챘다.
◇"종로·명동에 구권 환상 쫓는 사기단 활개"
당시 검찰은 보도자료를 통해 "종로, 명동, 역삼동을 비롯한 서울시내 다방에는 구권의 환상을 쫒아 헤매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그중 일부는 구권화폐 교환을 빙자한 사기단"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런 사람들은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상경해서 여관, 여인숙 등 숙박시설에 장기 투숙하다가 매일 다방에 가서 구권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등 일확천금을 꿈꾸며 하루를 소일하고 있고, 구권 거래가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면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을 생각에 한꺼번에 몰려가서 혼잡이 빚어지는 등 사회혼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경고했다.
검찰은 또 "피해자들은 부끄러운 마음에 신고도 하지 못하고, 사기단들이 '보안이 새나가면 신변이 위험하다'는 등의 위협성 발언을 하며 겁을 줬으며, 신고를 할 경우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구권거래에서 배제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신고를 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2005년 7월에는 전씨의 비자금 관리팀 행세를 하며 유명 여성 프로골퍼 K씨에게 접근해 10억원을 가로챈 사기범들이 구속기소됐다.
이모씨와 전모씨는 2003년 12월 전씨의 비자금 관리담당과 극동문제연구소 직원을 사칭해 "구권화폐 비자금으로 골프장 건설에 10억원을 투자하면 석달후 17억원을 주겠다"고 속여 K씨로부터 10억원을 받은 뒤 가로챘다.
◇전씨 동생 경환씨 사기단에 이용 당하기도
전씨의 '구권화례 비자금' 사기에 전씨의 동생 경환씨(71)가 이용된 적도 있었다. 이모씨와 조모씨는 2006년 6월 김모씨 등에게 접근해 "전 대통령의 구권화폐 비자금 65억원이 있는데 신권 50억원과 바꾸기로 했다"며 "45억원은 준비했는데 5억원이 모자라니 이 돈을 빌려주면 1억원을 얹어 6억원으로 갚아주겠다"고 속여 2억1000여만원을 가로챘다.
이 과정에서 이씨 등은 전씨 또는 전씨 측근과 가까운 것을 과시하기 위해 경환씨와 식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피해자들에게 확신을 갖게 했다. 당시 경환씨는 사기 및 세금체납 등의 혐의로 수배 중이었으나 소재가 불명한 상태여서 직접 수사당국의 수사는 받지 않았다.
경환씨는 그러나 나중에 체포돼 사기죄 등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안양교도소에 수감됐다가 뇌경색, 다발성 심장판막 질환 등으로 검사와 의료진의 심의 결과 8번째 형집행정지를 받아 병원에서 입원치료 중이다.
헌법재판소 사무처장과 전직 국회의원 출신 법조인이 '구권화폐 비자금' 사기에 연루된 적도 있었다.
김용균 전 한나라당 의원은 2000년 K씨에게 "전두환 대통령 등과 구권 화폐를 신권으로 바꾸는 사업을 하고 있는데 돈을 주면 높은 이익을 붙여 구권화폐로 돌려주겠다"고 속여 2년간 총 32억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로 기소됐다.
◇전직 국회의원도 "전두환 구권 비자금" 사기 연루
1심 재판부는 김 전 의원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했으나 2심 재판부는 "김 전 의원이 구권화폐 교환이라는 방법으로 피해자를 속였다고 보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역시 2008년 7월 원심의 판단을 유지해 결국 무죄가 확정됐다. 그러나 당시에는 법조인 출신의 유력당 의원이 연루됐다는 것만으로도 전씨의 ‘구권화폐 비자금’ 존재가 상당한 신빙성을 얻는 등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구권화폐로 지목되지 않았지만 전씨의 비자금으로 의심되는 자금을 이용한 사기는 올해 초에도 발생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7부는 지난 "1월 해외에 묶여 있는 아버지의 돈을 찾는데 도움을 주면 사례비로 5억을 주고, 15억원을 사업자금으로 투자하겠다"며 9750만원을 받아 가로챈 전씨의 조카 조일천씨(55)를 불구속 기소했다.
조씨는 전씨의 여동생인 전점학씨(78)의 아들로 전씨가 대통령직을 물러나고 비자금 추징 등이 문제되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해외에 가지고 있던 재산 1800억원이 동결됐다고 피해자들을 속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 당시에도 전씨의 비자금이 일가나 측근들을 통해 해외로 빠져나간 것 아니냐는 의혹들이 제기됐었다.
검찰은 '구권화폐 비자금'의 존재 확인 여부에 대해서는 원칙론을 고수하고 있다. 한 고위 검찰 관계자는 "압수수색 과정에서 나온다면 당연히 소유주체가 누구냐를 따져 미납추징금이면 당연히 환수대상"이라면서도 "이에 대한 탐지와 수사여부는 구체적으로 확인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이 최근 압수수색에서 전씨의 처남 이창석씨와 그의 아내, 동생 경환씨의 아내 손춘지 씨 등 직계가족 외에도 상당히 넓은 범위의 친인척 및 측근들을 압수수색한 것을 볼 때, 전씨가 막대한 규모의 구권화폐를 여러 측근들에게 분산해 은닉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검찰이 무게를 두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