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여적죄 적용 검토에 법조계 "수사의지 정말 있나"

"여적죄는 '전시상황' 전제로 하는 범죄..논란 많던 '내란 음모'보다 법리 더 후퇴"

입력 : 2013-09-09 오후 5:17:22
 
[뉴스토마토 최기철기자] 국가정보원이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구속) 등에 대해 ‘내란음모’와 함께 ‘여적음모죄’를 적용하기로 전해진 것과 관련해 법조계에서는 “오히려 법리가 퇴보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 의원을 수사 중인 국정원은 지난 주말 이 의원에 대해 여적음모죄 혐의를 추가하기로 하고 검찰과 의견을 조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적죄는 한국전쟁 이후 한번도 적용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말하자면 내란죄보다 더 '희귀한' 범죄다.
 
형법은 93조에 ‘여적(與敵)’을 정하면서 “적국과 합세해 대한민국에 항적한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형벌을 오직 사형만 규정하고 있어 내란죄보다 더 중한 죄이다. 또 여적을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처하고 있다.
 
그러나 국정원의 여적음모죄 적용 검토는 논란이 일었던 ‘내란 음모’보다 더 법리에서 멀어진다는 지적이다.
 
학계와 법조계에서는 여적죄를 적용하기 위한 전제 요건으로 ‘전시상황’이 필요하다는 게 일반론이다. 즉, 선전포고를 통해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 적국과 합세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공안 관련법에 정통한 한 변호사는 “실현가능성 등에서 내란음모죄가 성립되지 않을 위험이 있다보니 국정원이 여적죄를 추가하기로 한 것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법리면에서는 더욱 멀어진 해석을 내놨다”고 지적했다.
 
그는 “녹취록을 보면 이 의원의 강연 내용이나 분반토의 중 전쟁상황을 상정한 부분이 나오는 데 국정원이 이 부분을 여적죄가 적용될 수 있는 사안으로 오해한 것 같다”며 “평시에서는 여적관련죄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내란음모’ 보다 법리면에서는 후퇴했다”고 설명했다.
 
공안사건을 많이 처리하는 또 다른 변호사도 같은 지적을 했다.
 
이 변호사는 “여적죄는 평온한 평시상태가 아닌 선전포고 발령시점부터 적용이 가능한 범죄”라며 “적국과 합세해 항적하자고 모의를 했다손 치더라도 전제되는 상황인 전시가 아닌 평시에 모의가 이뤄졌다면 여적죄가 거론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전제상황인 전시상황을 빼더라도 ‘적국(敵國)’과 관련한 해석면에서 국정원이 앞서 같이 적용한 국가보안법과도 모순이라는 지적도 많이 나온다.
 
우리 헌법은 3조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법조계의 일반적인 해석이다. 하위 법령인 국가보안법 역시 북한을 국가가 아닌 반국가단체로 보고 있다.
 
우리 대법원도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인정하는 것이 통상적인 해석이다. 단, 1984년 대법원은 간첩죄 적용과 관련해서 북한을 적국으로 간주한 예는 있지만, 이는 특정한 상황으로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국정원이 이 의원 등에 대해 여적죄를 적용해 적국과 합세해 대한민국에 항적했다고 하기 위해서는 북한을 적국, 즉 국가로 인정한다는 해석이 된다. 이는 헌법과 국가보안법, 그동안의 대공수사의 기본 개념과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국정원이 이같이 위험부담이 큰 어려운 법리를 끌고나오면서까지 내란음모나 여적죄 등을 적용하는 배경을 두고도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판사출신의 한 변호사는 “법리와도 맞지 않는 자극적인 죄명을 계속해서 들고 나오는 것은 또 다른 배경이 있다는 의심을 충분히 가지게 하고 있다”며 “국가보안법만 가지고도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을 너무 어렵게 가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고 꼬집었다.
 
앞의 공안사건을 많이 다뤄온 변호사도 “수사가 진행중인 사항에 대해 내란음모니 여적이니 하는 구체적인 죄명을 거론하는 것은 오히려 피의자나 관련자들에게 숨으라고 알려주거나 증거물 없애기를 기다리는 행위”라며 “기존에 국정원이 해 온 대공수사기법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또 “내란음모나 여적죄나 모두 결정적인 논란이 있는 만큼 국가보안법으로만 기소할 가능성이 높다”며 “이렇게 요란하게 소리를 내면서 수사하는 것을 보면 정녕 수사의지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 의원 등을 비롯한 이번사건 관련자들이 국정원과 검찰조사에서 줄곧 진술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는 법조계는 별다른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으로 가장 최후의 방어권인 만큼 정치적이나 법적으로 별다른 해석이 필요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본인의 진술이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수사기관에서 세세히 따지다가는 오히려 말꼬리 잡혀서 잘못 진술하거나 왜곡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해석이 많다.
 
공안사건 경험이 많은 한 법조계 인사는 “수사단계에서 말을 많이 하면 소송에서 불리하게 판단될 수 있다”며 “이 의원 등은 국정원 등이 증거를 내놓으면 법원에 가서 다투겠다는 전략으로 보인다. 적어도 대공수사와 관련해서는 그게 현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최기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