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국내 자동차 산업은 내우외환에 휘청거렸다. 장기 불황에 소비 심리가 극히 위축된 가운데, 노사 문제로 생산량 차질을 빚었다. 환율 문제로 속을 썩이더니 급기야 수입차의 파상공세 앞에 철옹성 같던 내수 기반이 잠식됐다. 현대·기아차의 타격이 가장 컸다.
여기에 믿었던 해외시장마저 국내 자동차 업체들의 경쟁력 약화로 뒷걸음질 쳐야만 했다. 일본 업체들이 엔저 기조를 등에 업고 본궤도에 올랐다. 유럽의 벽은 여전히 넘기 어려운 산으로 다가왔다. 특히 하반기 들어 시장 점유율 하락세가 뚜렷해졌다.
무엇보다 국내 자동차 산업을 대표하는 현대·기아차가 품질 논란을 겪으며 그간 어렵게 쌓아올린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브랜드 이미지가 추락하면서 글로벌 제조사들과의 경쟁력 격차는 더 벌어졌다. 프리미엄 브랜드로서의 도약을 눈앞에 두고 쓴맛을 봐야 했다.
내년 대대적인 반격이 절실한 이유다. 일단 전망은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내년 서유럽 중심 회복세 완연..8400만대 자동차 시장을 잡아라
내년 전 세계 자동차 판매는 8400만대로 예상된다. 올해와 비교해 4%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시장의 완만한 경기 회복이 점쳐지는 가운데 중국을 비롯한 신흥시장 수요에 힘입어 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특히 6년 연속 침체를 겪던 유럽 자동차 시장이 서유럽을 중심으로 차츰 회복세를 나타내고 있어 7년 만에 판매 증가로 전환될 것으로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는 예측했다. 무엇보다 세계 경제의 엔진으로 자리한 중국에서만 1854만대의 자동차 판매가 예상됐다. 이는 올해 추정치인 1695만대 대비 9.4% 늘어난 수치다.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들 간 격전지인 미국 역시 올해 1560만대에서 내년 3.2% 늘어난 1610만대의 판매고를 기록할 전망이다. 유럽은 올해 마이너스 성장률(-3.8%)에서 벗어나 내년에는 2.5% 증가한 1387만대로 추정됐다. 재정위기를 떨쳐버리는 모습이다.
◇글로벌 자동차 판매 추이 및 현대·기아차 M/S.(자료=뉴스토마토, KAMA, 한양증권)
◇현대·기아차의 서유럽 시장점유율 추이.(자료=뉴스토마토, KAMA, 한양증권)
내년 전 세계적으로 자동차 시장의 성장이 유력한 가운데 현대차와 기아차 또한 성장세를 지속할 것으로 전망됐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올해 대비 각각 8%, 7% 증가한 510만대와 300만대를 팔 것으로 예상됐다. 이는 글로벌 성장률을 상회하는 수준이다.
이 같은 성장은 해외 현지공장이 주도할 것으로 예상됐다. 중국과 터키, 멕시코 등 해외공장 증설과 신차 출시 효과 등이 더해지면서 판매를 견인할 것이란 분석이다. 다만 환율로 인한 비우호적인 환경을 감안하면 영업이익률 증가폭은 매출 증가율에 미치지 못할 전망이다. 이는 수익성의 하락을 가져올 수 있다.
박홍재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장은 “유럽 시장은 내년부터 경기 회복세로 진입해 7년 만에 증가세로 전환할 것”이라면서 “다만 남유럽 금융권 부실과 부채 조정, 실업률 상승 등이 회복 속도를 제약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내수 여전히 '암울'..소비심리 위축 가중
다소 희망적인 해외시장에 비해 국내시장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무엇보다 실물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소비심리가 지속적으로 위축될 것으로 전망됐다. 가계부채 부담도 더해지면서 지갑은 꽁꽁 얼어붙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 시장의 선호도도 크게 변화하면서 완성차 업체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올 10월까지 차종별 판매 추이를 보면,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SUV만 유일하게 15.6% 증가했다. 반면 국내 시장을 주름잡던 중형차와 대형차는 역성장하며 변화의 물결에 휩쓸렸다.
특히 그간 경기 침체에도 승승장구하던 경차마저 기름값 하락과 소형 수입차의 등장으로 무려 12.2% 판매가 감소하며 울상을 지었다. SUV를 비롯한 다목적형 외에 승용차가 설 자리는 한층 좁아졌다는 분석이다. 이는 곧 여가와 레저를 중시하는 소비자 삶의 질적 변화와도 깊은 연관성이 있어 이 같은 흐름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내수 승용차 및 다목적 차량 판매추이.(자료=뉴스토마토, KAMA)
올 한 해 국내 자동차 산업은 그야말로 변화무쌍했다. 80% 가까운 시장 점유율로 사실상 독과점 체제를 이어가던 현대·기아차가 지난 8월 임단협 이후 지속적으로 판매 하락세를 보이면서 점유율이 70%대로 추락했다.
반면 현대·기아차에 눌려 기를 못 펴던 쌍용차와 한국지엠은 각각 34%, 1.2% 판매량이 증가하면서 부활의 조짐을 보였다. 과거 프리미엄급 대형차에 국한되던 수입차가 실속형인 중소형으로 전환한 데다, 이마저 디젤로 무장하면서 시장 판도를 뒤흔들어 버렸다.
내년 역시 올해 기조를 이어갈 전망이다. 무엇보다 1000조원에 육박한 가계부채 부담에 부동산 경기 위축마저 더해지며 소비심리를 크게 얼어붙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수천만원에 달하는 자동차는 소비 우선품목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
여기에 현대차와 기아차, 한국지엠, 르노삼성, 쌍용차 등 국내 완성차 5개사 모두 신차 출시가 예년보다 적다는 점도 악재로 꼽힌다. 현대차는 내년 상반기 출시 예정인 주력모델인 ‘LF 쏘나타’, 기아차는 카니발과 쏘렌토 후속모델로 난국을 돌파해야만 한다.
올해 ’투리스모’와 ‘뉴 코란도C’ 등 신차 효과를 톡톡히 누리며 높은 판매 성장세를 나타낸 쌍용차는 내년 신차 출시가 없어 그야말로 보릿고개를 넘어야 할 판이다. 르노삼성차도 연말 선보인 QM3에 모든 사활을 걸고 있다. 다만 사전계약 7분 만에 한정물량 1000대가 완판되는 등 초반 조짐이 예사롭지 않아 흥행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수입차 전성시대..독일차 중심에 서다
수입차의 공세는 해가 바뀌면서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중심에는 자동차의 본고장인 유럽을 휘어잡은 독일차가 있다. 가히 아우토반을 연상케 하는 고속질주를 이어가며 빠르게 국내시장을 잠식해 나가고 있다.
메르세데스 벤츠를 위시해 BMW, 폭스바겐 등 이미 명차 반열에 오른 독일 브랜드들은 한·EU 자유무역협정(FTA) 덕에 가격 경쟁력마저 갖추면서 국내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특히 올 한 해 국내 자동차 시장을 뒤바꾼 디젤 광풍의 배경에 이들이 자리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브랜드는 폭스바겐이다. 폭스바겐은 올 상반기 ‘폴로’, 하반기 '7세대 골프'를 내세워 국내 수입차 시장 1위 자리를 탈환했다. 이들 모두 소형·준중형 세그먼트로 구매자들의 수입차에 대한 인식 변화를 이끌었고, 특히 업체 간 치열한 경쟁이 맞물리면서 가격 거품 역시 빠졌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기조를 등에 업고 수입차는 올 10월까지 13만239대가 판매됐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약 20.6% 급성장한 수치다. 특히 이 기간 판매된 수입차의 65%가 고연비 디젤 모델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높은 기술력으로 디젤에 대한 시장의 고정관념을 단번에 깨뜨렸다.
자동차전문 조사기관인 마케팅인사이트가 추천 의향률, 재구입 의향률, 제조사 만족률 등을 종합 평가한 결과, 수입차가 57%를 차지해 38%를 기록한 국산차를 20%포인트 가까이 앞질렀다. 여기에다 최후의 진입장벽으로 여겨졌던 A/S 센터도 급속히 확충해 나가면서 수입차에 대한 부담을 털어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김연우 한양증권 연구원은 “내년 수입차 성장률은 지난해 13만대, 올해 15만대 대비 큰 폭의 성장인 16만5000대로 예상된다”면서 “국산차 대비 월등히 높은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프리미엄급 시장을 유지하면서도 주력 부대는 2000cc 이하급 실속형 차량한 것이 주효했다. 과거보다 현저히 다양해진 라인업에 디젤 엔진마저 얹혀지면서 시장의 변화를 재촉했다. 이는 곧 시장 절대강자인 현대·기아차의 무장 해제와 함께 여타 주자들의 약진을 가져왔다.
또 현대·기아차 중심의 왜곡된 시장 구도를 경쟁과 변화 체제로 이끌었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단기적으로 현대·기아차에게 가혹한 악재로 작용하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결국 경쟁력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자극제로도 활용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현대·기아차가 나란히 간판모델인 아반떼와 K3 디젤 모델을 출시한 점도 수입차의 공세에 따른 반격의 일환이란 해석이다. 또 하이브리드 라인업을 강화하며 현대·기아차만의 독창적 이미지를 더하고 있는 점도 순작용 효과로 풀이된다. 그간 국내시장에 안도하며 가솔린만을 고집해 왔던 현대·기아차로서는 예기치 못한 변화다.
◇결국 해답은 '글로벌'..만리장성을 넘어라!
결국 해답은 돌고 돌아 해외시장으로 좁혀졌다. 특히 신흥국의 대명사이자 미국을 누르고 세계 최대 단일시장으로 떠오른 중국에 대한 공략이 필수적이라는 분석이다. 다만 미국과 유럽 등 선진시장에서의 약진 없이는 만리장성 공략도 여의치 않아 보인다.
중국은 특히 승용차에서만 올 한 해 1650만대의 판매고를 기록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전년 대비 약 9.3% 증가한 수치다. 내년은 올해 판매량에서도 9.1% 증가한 1800만대 수준의 승용차를 빨아들일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무엇보다 현대·기아차가 최대 강점을 보이고 있는 승용차 부문에서의 성장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또 현대·기아차가 현지형 차량 생산 등 오랜 기간 중국 공략에 공을 들인 것에 더해 반일감정 등 정치적 이슈도 여전히 산재해 있다.
현대·기아차는 내년 중국 3공장(15만대)을 비롯해 사천현대상용차(10만대), 기아차 3공장(15만대) 등 중국 현지공장의 가동으로 물량부족 현상을 극복하고 시장 침투를 가속화한다는 방침이다. 여기에다 중국 소비자 취향에 부합한 현지화 차종을 대거 투입하고, 마케팅 역시 지역에 특화된 맞춤형 전략을 펼칠 예정이다.
◇중국 승용차 증가율 추이.(자료=현대차, 기아차, 한양증권)
중국을 제외한 인도와 브라질, 러시아 등 브릭스 국가들의 경우 올해 역성장하면서 기대감에 미치지 못했다. 올해 인도시장은 극심한 소비심리 위축과 자동차 구매환경 악화 탓에 전년 대비 약 8% 하락할 것으로 보인다. 내년 역시 기대감을 낮추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게 전문가들 조언이다.
브라질시장 역시 유럽의 선경기 상황과 연동해 경기 회복이 지연되고 있다. 신흥국의 특성상 경기 예측이 어렵고, 정치적 불안과 재정 압박 등을 감안하면 내년에도 업황 개선은 쉽지 않아 보인다. 다만 월드컵 특수를 통해 하반기 소비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
러시아시장 역시 올해 전년 대비 4.5% 역성장하며, 서유럽의 재정위기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내년 정부의 대규모 경기부양책이 예상되나, 이마저도 신흥국 대비 3% 수준의 완만한 회복세에 그칠 것이란 게 업계 전망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미국 경제 회복세와 유럽의 경기부진 완화, 신흥국 수출 증대 등으로 전 세계 경제가 완만한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다”면서 “다만 미국의 출구전략에 따른 신흥국 금융불안과 실물경제로의 전이 가능성 탓에 대외 경제의 불확실성이 상존한다”고 설명했다.
박재홍 자동차산업연구소장은 "그간 세계 경기 불황과 일본, 미국 경쟁업체의 부진 속에 현대·기아차가 공격적으로 점유율을 높였지만, 경기가 회복세를 보일 내년에는 한계에 부딪힐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