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병호기자] 박근혜 정부가 고용률 70%를 목표로 다양한 일자리 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청년 취업난은 갈수록 심각해 지고 있다. 특히 스펙중심의 채용환경은 청년들의 학문적 고민의 장이 되어야 할 상아탑을 스펙을 쌓는 공간으로 변질시켰고, 획일적인 인재를 생산해 내는 창구로 만들었다. 뉴스토마토는 오는 18일 코엑스에서 개최하는 '미래인재컨퍼런스2014-내 삶이 스펙이다'를 앞두고, 스펙만 좇는 채용환경의 개선을 위한 대안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
대학생 권모씨(28세·남)의 하루는 주변이 여전히 칠흙같은 새벽 6시 알람으로 시작한다. 대전이 고향이지만 방학인데도 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대신 그가 새벽부터 달려가는 곳은 학교 도서관이다. 권씨는 올봄 예정된 졸업도 미뤘다. 방학에도 공부하고 졸업까지 미룬 이유는 학점과 영어 때문. 권씨는 학점 3.7점(4.3점 만점)에 토익 960점이지만 지난 가을 공채 때 서류전형에서 줄줄이 떨어졌다. 그의 목표는 학점과 토익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올리는 것이다.
홍모씨(30세·남)는 한달 전 직장을 그만뒀다. 이전 직장이 적성에 안맞고 급여도 낮아서다. 그는 보수와 미래가 안정적인 금융권 재취업을 노리지만 상황이 만만치 않다. 대학 때 1년 동안 유학준비에 매달리다 보니 남들처럼 자격증이나 봉사활동, 공모전 등을 준비하지 못한 탓이다. 그는 요즘 취업에 도움이 될까 해서 100만원이나 하는 수강료를 내며 공인재무분석사(CFA) 자격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권씨와 홍씨처럼 사는 청년들, 이른바 '스펙족'은 갈수록 좁아지는 취업 문을 뚫기 위해 다른 구직자보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조건(스펙)을 갖추려는 사람들이다.
◇'스펙족'을 겨냥해 서점가를 매운 각종 영어교재들(사진=뉴스토마토)
이들은 대기업 입사의 꿈을 좇아 당장의 낭만을 포기하고 현실을 미래에 저당 잡혔지만 점점 치열해지는 스펙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을까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최근 커리어넷과 잡코리아 좋은일자리연구소 등이 조사해 발표한 자료를 보면, 청년 구직자 1155명 중 67.4%가 구직 과정에서 '스펙의 벽'을 체감하고 있다. 또 대학생 658명 중 71.1%는 '전공보다 스펙이 중요하다'고 응답했고 일부는 '스펙이 부족해 올해 취업에 자신 없다'고 밝혀 구직자들 사이에서 스펙 체감도가 상당히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홍씨는 "기업 인사팀은 어학연수 경험을 가장 중요하지 않은 스펙으로 본다는 말까지 들리고 나도 이게 실제 직무에서는 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안다"며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다 스펙쌓기를 하니까 나도 어쩔 수 없이 이런 추세를 따라간다"고 말했다.
스펙쌓기는 학과공부 때문에 시간이 부족한 학기 중보다 시간이 비교적 여유로운 방학 때 더 치열하다. 홍익대 취업진로지원센터 관계자는 "1 대 1 컨설팅과 방학 취업스쿨이 3~4학년 사이에 인기가 좋다"며 "입사서류 첨삭과 이미지 컨설팅에 대한 수요가 높다"고 설명했다.
◇취업을 위해 준비 중인 스펙(2013년 기준, 자료=전국경제연합회)
이처럼 구직자들이 스펙에 매달리는 이유는 취업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 500대 기업을 상대로 조사한 올해 신규 채용예정 인원은 3만902명. 하지만 지난해 기준 청년 실업자와 취업준비자는 92만9000명이나 됐다. 단순 계산으로만 따져도 500대 기업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30명 중 한명꼴인 셈이다.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의 김수현 연구원은 "경제난과 취업난이 겹쳐 취업이 계속 힘들어지면서 구직자들이 조금이라도 튀기 위해 학점과 토익 등 '눈에 보이는' 숫자에 집착한다"며 "스펙은 학벌이나 개인의 의지 문제라기보다 사회구조적 문제"라고 말했다.
스펙열풍에 따른 사회경제적 낭비는 매년 수조원으로 추정된다. 장후석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원은 "취업준비자의 구직비용은 생활비 빼고 월평균 27만원"이라고 분석했다.
이를 전체 청년 실업자와 취업준비자 수로 계산하면 1년간 비용만 어림잡아 3조원 규모. 여기에 대기업 입사를 위해 중소·중견기업 취업을 포기하거나 졸업을 미루는 등의 기회비용까지 고려하면 사회경제적 손실은 그보다 훨씬 더 불어난다.
◇연도별 워킹홀리데이 참가현황(자료=외교부)
그러나 연간 3조원대 스펙시장에서 가장 불안감을 느끼는 이는 역설적이게도 스펙에 매달리는 구직자다. 어렵게 만든 스펙이 대기업 행(行)을 반드시 보장하지 않는 데다 지금 투자한 비용은 나중에 미래 소득으로 다시 갚아 나가야 해서다.
권씨는 "스스로 능력을 개발하고 조건이 더 나은 곳에 입사하기 위해 투자하는 비용은 개인의 선택"이라며 "그러나 학자금 대출이나 취업비용은 결국 미래 소득에서 갚아야 하는데 나중에 가계에도 나쁜 영향을 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구직자라면 누구나 대기업 입사만 바라보고, 적성과 흥미에 맞지 않는 취업용 스펙쌓기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영어나 학점, 자격증이 아닌 다른 스펙을 좇는 사람도 있다.
고모씨(25세·남)는 3년 전 군대를 제대한 후 바로 대학을 휴학했다. 토익이나 어학연수 대신 전문 댄서를 준비하며 춤을 배우고 음악을 공부 중인 고씨. 그는 "댄서가 되는데 토익이나 학점은 도움이 안 된다"며 "직업 안정성이나 대기업 연봉이 부럽기도 하고 남들은 '딴짓'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더 좋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5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삼성협력사 채용한마당' 현장(사진=뉴스토마토)
대기업 입사만 겨냥한 국내 고용시장에서 고씨와 같이 취업용 스펙을 거부하자는 목소리는 고용·취업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철기 한국산업기술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지금 같은 스펙중심 채용은 노동시장의 비효율성과 사회경제적 비용을 초래한다"며 "직무와 무관하고 추상적인 스펙보다 자신의 역량을 기초로 직무를 찾고 역량을 체계적으로 개발하는 게 진짜 스펙"이라고 주장했다.
장후석 연구원 역시 "이직 사다리가 차단된 고용시장에서 첫 직장은 좋은 직장이어야 한다는 구직자의 인식 때문에 취업준비에 큰 비용이 투자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며 "고용 불일치는 단순히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공급의 문제뿐 아니라 수요자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구직자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계속>
□스펙(Spec: Specification) : 설명서, 명세서를 의미. 취업난이 심한 국내 고용시장에서 스펙은 취업을 보장하는 첫번째 요건으로 통용된다. 그러나 누구나 다 쫓는 스펙보다 나만의 역량과 스토리를 만드는 '스펙 아닌 스펙'이야말로 취업의 지름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뉴스토마토는 오는 18일 서울 코엑스 그랜드볼룸에서 '미래 인재 컨퍼런스 2014'를 개최합니다. 우리사회의 일자리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는 한편 미래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상을 제시하는 논의의 장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