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전재욱기자] 1991년 '유서대필 사건'에 연루돼 동료를 죽음으로 내몰은 죄명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만기복역한 강기훈씨(50)가 23년만에 누명을 벗었다.
서울고법 형사합의10부(재판장 권기훈)는 13일 강씨의 재심 선고공판에서 당시 필적감정의 오류를 지적하며 자살방조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강씨의 자살방조 혐의를 유죄로 인정한 결정적인 증거인 1991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서가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이같이 판결했다.
재판부는 "1991년 국과수 감정인은 유서의 필적과 피고인 강기훈의 필적이 동일하다고 감정했으나, 판단의 근거가 된 유서에 적힌 글자의 특징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어서 특징으로 보기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감정인이 '보'를 '오'로 잘못 판독하고, 유서의 'ㅆ'과 'ㅎ'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고려하지 않는 점을 들어 "전문 필적감정인도 잘못 읽을 정도로 유서 필적에는 희소성이 있는데, 이는 피고인의 필적에서는 나타나지도 않는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재판부는 당시 국과수가 유서의 필적이 분신자살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의 것이 아니라고 감정한 데 대해 "필적감정의 일반 원칙을 위반한 것이어서 감정 결과에 신빙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김씨의 필적과 대조를 위해 제출된 전민련 업무일지와 수첩도 김씨의 필적을 확인할 증거로 인정됐다.
재판부는 김씨가 쓴 전민연 업무일지에 유서와 같은 필적과 제 3자의 필적이 섞여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관련자의 증언 등을 종합해 김씨가 작성한 것으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당시 국과수의 감정결과를 신뢰할 수 없는 점과 유서의 필적이 김씨 본인의 것일 가능성을 모두 종합해,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피고인이 유죄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수 없을 만큼 혐의에 대한 입증이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강씨는 재심의 대상이 된 사건에서 국가보안법과 자살방조 혐의가 모두 유죄로 인정돼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6월을 선고받았다.
이번 재심사건에서는 강씨의 자살방조 혐의에 대한 심리만 이뤄진 탓에 국보법은 유죄가 그대로 유지됐다.
이에 따라 재심 재판부는 강씨에게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강씨가 이미 징역 3년을 만기복역한 터라 이날 징역형을 선고받았다고 해서 다시 옥살이를 하는 것은 아니다.
선고가 끝난 직후 법정에서는 박수가 터져나왔다. 강씨는 1991년 사건이 터진 직후부터 이날까지 23년 동안 자신을 변호한 이석태 변호사와 악수를 나눈 뒤 취재진 앞에 섰다.
강씨는 "오늘 사법부의 판결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 큰 의미가 있다"며 "1991년부터 주변에서 똑같이 아파하고 괴로워 한 수많은 사람들을 나는 기억한다. 이분들의 아픔이 오늘 판결을 통해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동료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가에 대한 우리 사회의 도덕전 근간을 묻는 진실과 허위의 싸움"이라며 "오늘 판결은 우리 사회에 한 획을 그은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유서대필 사건은 1991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자살하자, 검찰이 김씨의 동료였던 강씨에게 유서를 대신 쓰고 자살을 부추겼다며 기소해 불거졌다.
강씨는 이 사건으로 징역 3년과 자격정지 1년6월을 선고받고 만기복역한 후 진실화해위원회 결정에 따라 2008년 재심을 청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