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요즘처럼 실감나는 때가 없다. `법은 멀고 말(주먹)은 가깝다`고 돌려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즉각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권력자의 말을 주먹(힘, 폭력)에 비유한 것으로 나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대통령의 서슬에 온나라가 `규제 없애기 운동`이라도 펼치는 분위기다. 그렇게 애써도 안되던 일이 술술 풀리게 된 기업들의 입장에서는 "법은 멀고 말은 가깝다"는 말이 실감날 것이다.
지난 20일 박근혜 대통령은 TV에 출연해 민원인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 자리에서 직접 규제를 없애라고 장관들에게 지시하는 장면을 국민들에게 생중계로 보여줬다. 국민 개개인이 뭘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북하고 불편했다.
아주 기본적인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국무위원(장관)들을 TV 카메라 앞에 모아두고 대통령이 문제해결을 종용하는 듯한 모습을 봐야 하는 거북함, 그 광경을 지켜보는 공무원들의 불편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날 TV에서 제기된 문제점들은 그동안 관계부처 실무자들이, 실무자 선에서 안된다면 장관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풀었어야 할 문제다. 국무위원들인 장관들의 입장에서는 "우리 일 못한다"고 대놓고 홍보한 꼴이 됐으니 많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장관들이 모습을 지켜본 공무원들도 불편했겠다. TV에 출연해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한 분들은 절실한 문제였겠지만 국가 전체의 틀에서 보면 사소할 수도 있는 문제를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챙기니 실무자 입장에서는 열심히 일했지만 그 결과가 좋지 않은 것 같아 몹시 불안하고 불편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절대권력(?)을 쥔 대통령의 `말`이 국가를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당연히 법 위에 대통령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법과 시스템에 의해 사회가 유지되는지 알았더니 착각이었나 싶다.
대통령의 말(지시)만 따른다는 것은 '나는 책임을 지지 않고 시키는대로만 하겠다'는 수동적인 업무태도라고 볼 수 있다. 대통령 뿐 아니라 장관이 지시하는 일만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업무에 대한 일체의 책임은 그 업무를 지시한 대통령이나 장관에게 있지 그 아래서 일하는 공무원인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자세로 일하는 것은 아닌지, 법보다 가까운 권력자의 말에 함몰된 `영혼없는 공무원`이 양산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 또 걱정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인사권을 쥔 정무직 공무원(장차관급)과 그들을 따르는 공무원들이 대통령의 말을 우선시하는 것을 도의적이든, 법률적이든 문제삼을 수는 없을 듯 싶다. 공무원 선서상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공무원 선서에는 "법령을 준수하고 상사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한다"는 내용이 맨 처음, "국민의 편에 서서 정직과 성실로 직무에 전념한다"는 내용은 그 다음이다. 상사의 명령에 대한 복종이 우선이고, 국민의 편에 서는 것은 나중인 셈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 부분에 "나는 정의의 실천자로서 부정을 뿌리 뽑는데에 앞장선다"고 돼 있다. 선서 자체가 상관의 명령을 우선시 하도록 돼 있으니 할말은 없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정의의 개념도 바뀐다.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정의를 이렇게 조롱했다. 서민들의 정의는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닥을 기는 정의"고, 군주들의 정의는 "원하는 것은 다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정의"라고.
가끔은 상관의 명령을 어기면서 국민의 편에 서주고, 군주의 정의에 끌려가지 않는 정의의 실천자가 돼 주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말보다 법이 우선임을 권력자에게 깨우쳐주는 것도 공직자의 역할이 아닐까.
"정권은 유한하지만 관료는 무한하다"고 외쳤던 퇴직한 공직자들의 기개를 새삼 높이 사고 싶다.
김종화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