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헌 (사진제공=NEW)
[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내일 모레면 마흔. 여전히 '조각미남'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미남스타 송승헌으로 각인되면서 정작 배우의 관건인 연기력을 놓고 이런저런 말이 그를 괴롭혔다. 적어도 영화 '인간중독'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잘 생겼기 때문에, 인기가 많기 때문에 신비로웠던 송승헌의 노출이 베일을 벗었다. 옷과 함께 자신의 껍질도 온전히 벗어던졌다. 더 이상 청춘스타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각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허물을 완전히 벗어던졌다. 이 과정이 그에게 여유를 줬고, 그제서야 가려졌던 배우로서의 진가가 드러났다.
터닝포인트가 온 것일까. 지난 14일 만난 인간 송승헌에게서도 배우로서의 깊이와 여유가 느껴졌다. "60까지는 연기만 할 거예요"라는 송승헌에게서 "나도 배우"라는 자신감이 강하게 묻어나왔다.
지난 1995년 의류브랜드 모델로 시작해 남자 세 명, 여자 세 명과 동거동락했던 대학생, 이후 가을의 동화 속 주인공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배우로서는 호평 받지 못했던 송승헌. 약 18년을 돌고 돌아 배우로서의 여유를 갖게 된 그는 새로운 터닝포인트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송승헌 (사진제공=NEW)
'인간중독'의 송승헌은 참 낯설다. 특유의 연기패턴이라고 해야 할까, 클리셰라고 해야 할까, 감정연기를 펼칠 때의 눈빛과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눈을 쳐다보지 않고 말하는 대사, 감성이 풍부한 예술가 같은 이미지 , 여배우가 쓰다듬는 거북이 껍질 같은 엉덩이까지 우리가 알던 송승헌은 아니다.
전쟁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명성 높은 군인 김진평이 모든 걸 버리고 이루고 싶었던 사랑 이야기. '인간중독'의 송승헌은 허물을 벗은 기분이 강하다. 모든 것이 기존과 새로웠던 '인간중독'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노출도 있었고, 부하의 와이프를 사랑하는 설정. 불륜이죠. 해본 적도 없었고"라는 송승헌은 김대우 감독에 대한 신뢰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이는 작품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다.
송승헌은 "인간 본성과 욕망을 섬세하면서도 야하고 재밌게 그려내는 감독님을 믿었다. 어떻게 만들까가 궁금했다. 모든 걸 내던지는 군인의 사랑도 좋았다. 불륜이나 노출 같은 설정 때문에 김진평을 안 한다면 후회할 것 같았다"고 밝혔다.
◇송승헌과 김대우 감독 (사진제공=NEW)
그래서 만나게 된 김 감독과의 첫 미팅. 선입견이 있었던 탓일까 첫 인상은 썩 좋지 못했다.
"여자를 좋아할 것 같았고, 야한 생각을 유독 많이 할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었다"고 말한 송승헌은 "깐깐해 보이고, 수염도 거칠고, 고집도 셀 것 같았다. 외모를 봤을 때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촬영을 시작하면서 자상하고 섬세하고, 인간적으로 고수로도 느껴지고, 말 한마디에 고개가 숙여졌다"고 말했다.
앞서 만난 적 있는 김 감독은 송승헌의 성품에 대해 칭찬을 늘어놨다. 특히 "내가 너무도 송승헌을 괴롭혔는데, 나를 요만큼도 거역하지 않았다"고 했다. 되도록 "하지마"를 외쳤다고 했다. "송승헌 클리셰와의 전쟁"이라고 했던 김 감독은 송승헌에게 무엇을 요구했을까.
"정말 많았죠. 배우들은 모두 연기 패턴이 있는 건데 그걸 없애려고 노력하셨다."
연기패턴을 지우려고 했다.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김진평을 위해 송승헌은 목소리를 더 줄였고, 사람과 얘기를 할 때도 눈을 보지 않았다. 부하를 혼내는 장면에서도 이게 혼 내는 건지, 그냥 말을 하는 건지 애매했다. 인물 김진평이 그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송승헌은 "시선처리나 말투에서는 연기 패턴이 있는데, 아주 소소한 것까지 디렉션을 했다. '이게 뭐지?' 싶었다. 안하던 요구를 하니까. 이후에 캐릭터를 만드는데 의도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스타이기에 감독에게 대들 법도 한데 이미 마음으로 김 감독을 인정했던 터라 군말 없이 요구를 들었다. 그리고 김진평으로 태어났다. 18년간의 자존심도, 자신이 갖고 있던 울타리도 내던진 송승헌은 그렇게 자신의 대표작을 만들었다.
◇송승헌 (사진제공=NEW)
송승헌은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이제는 뭔가 변화를 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갖혀진 틀을 깨고 스스로 변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싶다. 30대 초반까지는 언제까지 연기를 할까라고 고민을 했다. 다른 것도 하고 싶었다. 최근에는 50~60까지 연기를 해야겠다고 목표를 정했다. 길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중독'을 택할 수 있었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절대 안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변화를 택한 '인간중독'의 송승헌은 '신세계'의 이정재가 그랬던 것처럼, '똥개'의 정우성처럼 물이 올랐다. 잔인해보이는 악역도 눈에 들어왔다. 어떤 배역이든 다 잘할 것 같다는 기대감을 줬다. 극장가를 찾는 관객수는 그 변화를 읽었다는 방증이다.
"캐릭터에 변화를 주고 싶다"는 송승헌은 "바르고 착한 것만 하는 게 아니라 잔인한 악인도 할 수 있고, 비열할고 싶기도 하다. 최근 시나리오 들어오는 것을 보면 그 바람을 알아주시는 것 같다. 이제 다양한 송승헌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인간중독'을 통해 변화를 꿈꾸는 그. 배우로서의 터닝포인트를 맞이한 송승헌. 이제는 더 이상 잘생긴 남자가 아닌 잔인하고도 비열한 악인으로서의 송승헌을 만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긴다. 연기력 면에서 확신을 주지 못했던 송승헌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그는 그렇게 진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