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병호기자] 박근혜정부가 자충수에 빠졌다. 세월호 참사 후 안전과 인허가, 불공정 거래 등을 규제할 감독기관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지만 정작 지금까지 규제기관의 힘을 빼고 손발을 잘라 온 게 정부였기 때문이다.
22일 공정거래위원회와 동반성장위원회, 원자력안전위원회 등 주요 규제·감독기관들은 1년 새 하늘과 땅을 오가며 부침을 겪은 기관의 위상에 격세지감을 느끼고 있다.
실제로 공정위는 지난해만 해도 하도급법을 개정하고 직제를 개편하는 등 불공정거래 단속에 대해 한껏 기세가 올렸지만 지금은 경제부처 중 존재감이 크게 떨어졌다.
최근에는
SK(003600)와
풀무원(017810) 등 기업들이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에 반발하며 제기한 행정소송에서까지 줄줄이 패소하고 있다. 경제민주화를 강조하던 박 대통령이 경제민주화 속도조절론과 규제완화를 주장하며 기업을 편들고 나서고부터다.
◇정부 세종청사에 입주한 공정거래위원회(사진=뉴스토마토)
더구나 지난 21일에는 '갑의 횡포'를 막기 위해 2012년 도입했던 주유소 혼합판매 등 9개 분야 가이드라인과 9개 모범거래기준을 폐지하기로 했다. 최근의 규제완화 흐름에 맞물린 것이지만 정권 초의 모습과 달리 이제는 좁아진 입지를 염려할 판이다.
그나마 공정위는 아직 '경제검찰'이라는 말을 듣지만 동반위는 체면이 말이 아니다. 동반위는 2010년 이후 한해 예산이 50억원 선에 그쳐 조직확대에 난항을 겪고 있다.
최근에는 위원장 인선까지 꼬였다 2012년 4월 동반위의 2대 위원장이 된 유장희 현 동반위원장은 원래 지난달 29일 2년 임기를 마쳤지만 아직 후임자를 못 찾았다.
동반위에 따르면 동반위원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5단체 추천을 받아 정부가 임명하지만 산업계는 자신들을 제약할 동반위원장 인선을 이래저래 미루는 상황이다.
이들은 또 동반위의 가장 큰 성과이자 핵심 업무인 중소기업 적합업종에도 무용론을 주장하고 있어 동반위가 자칫 출범 4년 만에 문을 닫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크다.
원자력발전소를 규제·감독하는 유일한 기관인 원안위는 박근혜정부 들어 대통령 직속에서 국무총리 소속으로 변경됐으며, 위원장은 장관급에서 차관급으로 격하됐다.
시민단체 등은 안전한 원전 운영을 위해서는 원안위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정부는 오히려 원안위의 규제권한을 약화시키는 내용의 '원자력발전 사업자 등의 관리 감독에 관한 법률안'을 만들어 원전을 관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지난 19일 오전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관피아 척결을 강조하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News1
공정위과 동반위, 원안위는 정부의 오락가락 행보와 기관 죽이기 실태를 보여준다. 이들은 국민 안전과 행복을 지킨다는 점에서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몸집을 키우고 힘을 실어줘야 하지만, 정부는 그간 예산을 막고 규제기능을 줄여 위상을 계속 낮췄다.
또 이들 기관의 기관장과 감사 등에서 관피아를 척결하겠다고 강조해 전문성과 직원의 사기를 떨어트릴 우려마저 키웠다. 가뜩이나 제대로 힘을 못 쓰는 데 개각설까지 나돌며 가만히 있는 사람을 내보낼 태세니 일부 기관장은 거취마저 불투명해졌다.
경제민주화와 규제·감독은커녕 독립성을 갖고 기본적인 업무조차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으니 정책자체가 표류하고 역효과만 일으킨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원안위 관계자는 "세월호 사고나 원전 비리 관피아 등은 개인 도덕성도 문제지만, 규제·감독기관으로서 보람과 자긍심을 못 느끼고 미래가 불안했기 때문에 원칙을 어기고 일탈을 일으킨 것"이라며 "정부가 규제·감독기관의 위상과 시스템을 보강하고 힘을 실어주지 않으면 사고의 악순환은 끊기 어렵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