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그래도 장영실을 기다린다

입력 : 2014-12-18 오후 4:22:21
'상의원'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연말에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상의원'은 조선시대 왕실의 의복을 만들고 그밖에 여러 필요 물품을 제작, 조달하는 일을 하던 관청이다. 조선 태조가 집권한 그해에 만들어서 궐내에 뒀다.
 
상의원이란 이름을 처음 접한 건 거기서 일했던 위대한 과학자 한사람의 위인전에서였다. 조선을 통틀어 최고의 과학자로 손꼽히는 장영실이 주인공이다.
 
장영실 동상.
장영실은 어린 시절부터 제련, 축성, 농기구, 무기 등의 제작과 수리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고 이러한 손재주 때문에 왕실 물품을 만드는 상의원에서 궁궐기술자로 일하게 됐다.
 
장영실은 측우기를 만들었고 수표를 발명했으며 특히 시간을 자동으로 알려주는 물시계, 자격루를 제작했다.
 
장영실로 인해서 조선의 과학기술은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뤘다.
 
2004년 권위있는 전세계 천문학자단체인 국제천문연맹(IAU)은 우리나라 학자들이 발견한 소행성에 위대한 조선 과학자들의 이름을 붙였다. 최무선별, 이천별, 장영실별, 이순지별, 허준별 등이다.
 
별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게 된 이들 다섯학자들 중 넷은 문신 혹은 무신집안으로 모두 양반가 출신이다.
 
그러나 장영실은 아니었다. 그는 동래현의 관노비였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중국 항저우에서 조선으로 옮겨온 중국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동래현의 관기였다.
 
아버지는 외국인노동자, 어머니는 기생이었으니 이만큼 미천한 신분도 드물었다.
 
그렇지만 당시 조선의 최고통치자들은 사람을 쓸 때 신분보다 능력을 우선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태조 이성계 본인이 궁벽한 변방 장수 출신인데다 이후 태종, 세종조만 해도 개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라 나라 기틀을 잡는데 인재들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장영실도 이에 힘입어 궁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후 그는 세종의 각별한 지원아래 여러 과학기술 업적들을 쌓기 시작한다.
 
장영실이 정5품의 상의원 별좌로 임명될 때 신하들의 반대가 없지는 않았다.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했던 보수의 전형 이조판서 허조는 "기생의 소생은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며 이른바 '국기문란' 사태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병조판서 조말생은 "가능하다"며 세종을 지지했다.
 
세종이 재차 다른 대신들을 불러 논의한 결과 결국 '임명가능'으로 결론이 지어졌다. 세종의 의지가 강력했겠지만 신하들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장영실에 기회를 주자는 쪽이 우세했음을 짐작할 만하다.
 
장영실과 그의 업적이 결실을 보게 된 것은 결국 본인의 능력에 더해 당시의 우호적인 정치사회적 환경도 배경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역량있는 스타트업이 각광받고 누구나 아이디어만 있다면 도전할 수 있는 창조경제의 시대인 지금 조선의 장영실이 이 시대에 태어난다면 그는 똑같이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을까.
 
지금은 신분제도 없고 빈부의 귀천도 없다지만 정말 그는 자신의 이름을 별에 붙일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과학자가 될 수 있을까.
 
손재주가 뛰어났다는 이유로 신생국 조선은 그를 발탁했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은 그를 알아볼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반드시 장영실은 위대한 과학자가 된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우리 사회는 겉으로는 능력위주 사회, 창의적 인재가 대접받는 사회지만 실제로는 '정답은 하나뿐이고 너는 그걸 따라야해 사회'이기 때문에 특히 더 그렇다.
 
중학생 아들을 유학보내려고 결심했다는 대학 친구는 연말 술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현아를 보니 한국은 이제 신분제 사회가 됐다는 확신이 드는 거야. 선택받은 몇몇 가문 외에 나머지는 열심히 키우고 가르쳐도 결국 전부다 그 몇몇 집안 노비되는 것 아니냐 말야. 이럴 바엔 아예 초장부터 내보내서 거기서 지 하고 싶은거 하게 해주는게 맞는 거지."
 
모두가 창의적 인재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대학은 영어 수학 점수가 높은 학생을 원하고 기업과 사회는 일사분란함을 원한다. 그러면서도 창조경제니 창의성 개발이니 하는 레토릭은 넘쳐난다.
 
장영실을 알아볼 눈은 없으면서 틀판에 박힌 구호만 우렁찬 사회다.
 
사회에서 우대받기 위해서는 가야할 인생 진로가 이미 있고 이를 벗어나면 우리는 또하나의 길로 보지 않고 항로에서 이탈했다고 생각한다.
 
이런사회에서는 앞으로도 조현아는 많이 나올테지만 이제 장영실은 다시 오지 않는다.
 
개국의 에너지가 넘쳤던 조선초 사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활력을 잃고 우물안 개구리가 되어 갔다.
 
임진년 왜란 이후 장영실이 태어났다면 그는 아마 동래현의 관노로 관아에서 쓸 책상이나 잔뜩 만들고 일생을 마쳤을 것이다. 지금과 조선말은 얼마나 다른가.
 
이호석 IT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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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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