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보면 어떨까, <국제시장>

책잡힌 사람

입력 : 2015-01-11 오후 4:05:38
흔히 ‘동전의 양면’이라고들 한다. 앞면만 있다고 동전이 아니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앞면과 뒷면이 함께 있음이 확증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을 ‘동전’이라 부를 수 있게 된다.
 
뜬금없지만,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떠오른 생각이다. 최근 ‘천만’을 향해 무섭게 달리고 있는 이 영화는 여느 천만 영화와는 다르게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마치 약 1년 전 개봉한 <변호인>의 재판 같다. 바로 그 ‘논란’ 때문에 이 영화를 보지 않으려 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으로 늘어가는 누적 관객 수와 몇 지인들의 추천으로 인해 안 보고 배길 수 없게 됐다. 더해 재미가 있건 없건, 논쟁거리가 될 만하든 아니든,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가 판단하고 싶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까도 내가 보고 까야’하니까.
 
◇국제시장 포스터(자료=CJ E&M)
 
그런데 웬걸, 영화를 보다 보니 먼저 흘러나온 건 비판이 아니라 눈물이었다. 물론 이 영화는 연출의 측면에서 보면 아쉬운 점이 매우 많았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익히 들었던 대로 ‘눈물 흘려라!’하는 식의 장면이라든가, 지나치게 우연을 끼워 맞추어 억지스러운 느낌이 드는 장면이 있었다. 이런 요소는 슬픔에 대한 몰입을 간간이 방해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펐던 것은, 그만큼이 우리 현대사의 능력(?)인 걸까.
 
영화를 다 보고 든 생각은 딱 두 가지다.
 
“아, 슬프다”
 
“잠깐, 근데 왜 이게 이데올로기야?”
 
이 영화가 왜 이리 시끄러운지, 인터넷을 검색해봤다. 전문가의 여러 평론들이 나왔다. 대체로 간추리면 이렇다. ‘기성세대의 시대적 과오는 덮어버린 저급한 신파..’, ‘파견 광부와 간호사의 노동력이 어떻게 경제적으로 분배 되었는지에 대한..’, ‘사회적 이면에 대한 성찰 부재..’. 물론, 이 영화를 ‘잘’ 만들었다는 말을 하고 싶진 않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연출의 측면에서 보면 전문 지식이 없는 내가 보기에도 산통을 깨는 요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를 향하는 대부분의 화살의 끝은 ‘시대’ ‘이데올로기’ ‘편향’ 등의 단어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게 과연 그럴 영화인가, 내 의문은 이거였다.
 
나의 논지를 전하기 전에, 내가 영화를 보면서 공감하고 느낀 소회를 먼저 적어두는 게 낫겠다.
 
덕수의 삶은, 즉 우리네 아버지들의 삶은 항상 생존, 생사와 같은 극단적 단어와 조응했다. 단적으로 영화의 시작, 덕수 인생의 시작부터가 6.25 ‘전쟁’이었다. 삶의 시작, 그래서 채 성숙하지 못한 정서로 받아들인 전쟁의 참상은 그들에게 지독한 트라우마를 안겼으리라. 가족의 죽음, 이별, 그리고 한민족에 대한 깊은 불신과 증오가 그것이다. 전쟁은 그것이 끝이 난 후에도 가난과 굶주림이라는 현실적 생존의 문제를 남김에, 이 트라우마는 정서적 ‘흉터’로 자리 잡았다. 독일에 광부로 파견되어 열악한 작업장을 버티며 조국의 가족들에게 돈을 부치고, 다시 살기 위해 베트남전에 참전할 때, 문득문득 이 트라우마는 현실 앞에 그 흉터를 내비쳤을 것이다.
 
특히 덕수는 6.25 동란 중 헤어진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로 가족만을 생각하며 살아온다. 이제는 자식들도 다 커서 자식의 자식을 낳고, 먹고사는 것과 전쟁의 두려움도 사라졌지만 덕수는 아버지의 기억으로 인해 ‘꽃분이네’를 죽어도 팔지 않으려는 고집을 부린다. 오랜 시간 지층이 퇴적되듯 반복적으로 누적된 그 트라우마가 집착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런 그의 옹고집을 자식들은 이해하지 못 하고, 덕수(기성세대)와 자식들 간의 불통과 갈등은 심화된다.
 
한 개인으로써 역동적인 덕수의 삶을 통해, 젊은 관객들은 그들의 트라우마를 보고 안쓰러움을 느끼게 된다. 젊은 세대와 소통하지 못 하는 기성세대의 트라우마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들여다보는 것. 이 영화가 젊은 세대에 남기는 소통의 매개는 그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트라우마를 보여줌으로써 결론적으로 ‘결국 우리 때문에 너네가 잘 먹고 잘 사는 거고, 우린 이렇게 힘들게 살았으니 니넨 배부른 소리도 하지 말고, 닥치고 살란 말야’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주었다면, 이 영화는 욕먹어도 싸다. 그러나 기껏해야 영화에선 “우리들이 고생해서 우리 자식 세대가 안 하면 된 거 아이가” 정도의 자기 위로가 전부다. 단순히 이 때문이 아니라, 중요한 건 말미에 나타난 덕수의 변화가 시사하는 바다.
 
영화의 끝에, 덕수는 ‘꽃분이네’를 팔기로 결심하게 된다. 자식들의 성원에 못 이겨서가 아니다. 자식들이 윽박지르듯 강요해서도 아니다. 그 결심의 순간 전에, 덕수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만나 그간의 고난을 털어놓으며 실컷 운다. 화면 속 덕수는 어느덧 6.25의 어린 덕수로 변해있었다.
 
“아부지, 저 그래도 아부지 말씀대로 가족들만 생각하면서 참 힘들게 살았슴더. 그래도 이 정도면 잘 살았지예?”
 
덕수(기성세대)의 자기 위로는 다음 세대에 대한 무시와 비이성적 아집의 근거가 아닌, 트라우마의 치유제로 작용한 것이다. 트라우마가 치유되자 덕수는 현실을 바로 볼 수 있었고, 꽃분이네에 대한 미련한 집착을 버릴 수 있었다.
 
심리학에선 흔히 상처 입은 어린 시절의 기억, 즉 트라우마에 관해 ‘어린 나’의 개념을 쓰곤 한다. 어린 시절의 상처 입은 내가, 다 자란 줄 알았던 내가 사실은 내면의 무의식 속에 어린 그때에 멈춰버린 나약한 내 자신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린 나’는 그때와 비슷하거나 그때를 유추할만한 상황이 닥칠 때마다 불쑥 의식의 창으로 고개를 내민다.
 
그 순간 이성적이며 어른스러운 ‘나’는 사라지고 ‘어린 나’의 미성숙하고 감정적이며 현명하지 못한 반응이 나타나게 된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은, 어린 내가 나타날 때마다, 나에게 ‘어린 나’가 있음을 스스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그리고 위로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나의 불안한 감정이 실제로 내 눈앞에 벌여진 현실을 왜곡하는 ‘어린 나’의 존재 때문인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나면, 비로소 ‘별 거 아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것이다. 덕수의 자기 위로가 어린 덕수를 치유하듯 말이다.
 
트라우마는 과거의 참상으로 내재된 기억이므로 현존하는 실체가 아니다. 전쟁이 그렇고, 탄광의 먼지가 그렇고, 빨갱이가 그렇다. 트라우마로 인해 현실 인식이 올바르지 않다면, 당연히 다른 사람과의 소통은 요원해진다. 결국 감독이 말하려 했던 소통은, 결과적으로 덕수 ‘스스로의’ 트라우마 극복을 통해 그 실마리를 보여주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 뒷이야기는 없기에 덕수와 자식들이 완전한 소통으로 나아갔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강력한 아버지의 기억으로부터 꽃분이네를 떨쳐 낸 덕수가 다른 트라우마쯤은 충분히 떨쳐냈으리라는 짐작이 과하진 않겠다.
 
영화는 기성세대를 옹호하지 않는다. 덕수가 마지막에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뒤엎고 스스로 트라우마를 깨듯, 세대 간 소통의 시작은 외려 기성세대의 ‘트라우마 깨기’에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물론, 소통의 통(通)은 양방향성을 내포하기에 어느 한 사람의 완전한 양보나 헌신적인 이해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그건 말 그대로 ‘양보’다. 그렇다면 소통을 위해 덕수의 자식들(젊은 세대)이 할 일은? 바로 그들의 삶의 역사를 들여다보며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즉, 그들 내면의 어린 덕수를 ‘같이’ 들여다보고 위로해주는 것이다.
 
덕수의 마지막 결심이 없었다면, 주제인 소통은 온데간데 없이 ‘논란 그대로’ 기성세대의 앞면만 비추는 영화가 될 뻔했다. 어쩌면 별 의미 없는 장면일 수도 없는 덕수의 결심이, ‘기성세대 스스로 이제 그만 트라우마를 내려 놓으시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덕수의 삶을 통해 ‘현대사에서 이루어진 불평등한 분배와 권력 구조의 이면’을 나타냈어야 한다는 주장보단 ‘덜’ 비약이지 않을까?
 
이 영화는 슬픈 가족 영화,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다. 또한 가족이면서 동시에 개인의 이야기다. 먹고 사는 문제 외에, 가족들의 뒷바라지 위해 자신을 잊고 산 평범한 ‘덕수들’의 이야기다. 몸소 광산에 뛰쳐 들어간 덕수의 삶에서 부의 분배를 논할 수는 없다. 아무리 봐도 이 영화는 단순하다. 감독은 복잡하게 생각한 사람이 아니다. 개인을 통해 사회로 나아가는 영화가 아니다. 사회의 파고 속에서 살아간 한 개인의 역사를 그린 영화다. 그래서 아무리 단위를 키워봤자, 아버지와 자식 간, 세대 간의 소통까지가 한계다.
 
영화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몇몇 기성세대 혹은 그들의 정치적 지지 세력이 이 영화를 보고 자위하며 영화를 끌고 이데올로기에까지 나아가는 건, 이런 단순한 영화이야기 외엔 정치적 정당성이 부재한 그들의 ‘빈약한 설득 논리’를 보여줄 뿐이다. 물론, 그런 기성세대와 덕수는 다르다. 아직까지 소통의 첫 걸음을 떼기는커녕 ‘덕수 내 편’만 외치고 있으니 말이다. 진짜 문제는 바로 ‘그들’이다. 덕수와 그들은 찍힌 연도만 같을 뿐 서로 다른 동전이다. 하여 서로가 양면으로써 하나의 논의 대상으로 묶일 수 없다. 그리고 <국제시장>은, 그들이 아닌 덕수의 이야기다. 그러므로 더욱이 정치나 사회 구조적 이야기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가 잘 만든 영화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동전의 양면이 있다. 빛나는 앞면도 있고, 어두운 뒷면도 있다.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앞면이 있으면, 어떻게든 숨기고픈 뒷면도 있다. 하지만 앞면은 앞면대로, 뒷면은 뒷면대로 그렇게 그대로 그 한 명의 사람을 이룬다. ‘덕수’라는 동전을 살펴보자. 불통의 뒷면, 그 이면에는 산업화의 주역이 있었고, 또 그 뒤에선 항상 생사와 존망을 걱정하다 불통을 만든 원인이 된 트라우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념이 아니라 우리가 의문 없이 동전의 양면을 받아들이듯이, 그렇게 그들을 보면 안 될는지.
 
물론, 다시 말하지만 내가 느낀 영화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타인과의 소통은 기본적으로 올바른 현실 인식을 전제로 한다. 어느 한쪽의 다친 내면이 현실을 왜곡한다면 치유해야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식은 상처 입은 다리에 약을 발라주고 입김을 불어줄 뿐, 통증을 참아가며 스스로 다시 걸으려 노력하는 건 덕수의 몫이다. 그러고 나서야, 둘은 보폭을 맞춰 함께 걸을 수 있다. 
 
강윤철 기자  www.baram.asia T F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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