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에 있는 어떤 나라는 국민들 가운데 국가의 강압적인 정책에 대해 두드러지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일상적으로 체포하고 고문했다. 그 국가는 비밀 핵무기 개발계획을 시작했고, 소형 잠수함을 포함한 하이테크 무기들을 비밀리에 외국에 주문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의 회고록 한국어판이 지난달 15일 <역사의 파편들>이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책의 후반부 ‘악마화가 부르는 위험’ 챕터에는 1970년대 중반의 한 나라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북한인가 싶었지만 아니다. 그 “어떤 나라”는, 바로 한국이다.
그랬던 한국은 왜, 어떻게 변할 수 있었나. 한국인 입장에서는 민주화운동 때문이겠지만, 그 시절 미 중앙정보국(CIA) 한국지국장을 했던 미국인 그레그의 입장에서는 ‘대화와 개입’ 때문이었다.
그는 “오늘날 오바마 (미) 대통령은 한국을 아시아에서 가장 믿고 의지할 만한 동맹국으로 보고 있다”며 “우리 미국과 서울의 관계에서 나타난 변화의 모습은, 기복은 있었어도 30년 이상 유지된 지속적인 대화와 개입의 결과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북한 얘기로 넘어갔다. “북한과도 그 비슷한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오랜 시간이 걸리고 어려운 일이겠지만, 우리가 북한과 다시 전쟁을 할 준비를 하지 않는 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한국과 같은 ‘성공 사례’가 있는 정책을 북한에는 왜 쓰지 않는 것일까. 그레그의 논지에 따르면, 미국이 북한을 ‘악마화’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로 하여금 북한을 악마로 보게 만드는 정부 차원의 캠페인이 수십년 이어지면서 북한과 대화를 추구하는 정책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그레그는 “우리가 싫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 지도자나 집단을 무조건 악마화하려드는 경향이 우리를 끊임없이 곤경에 몰아 놓는 원인”이라며 “우리는 우리의 무지가 만든 간극을 편견으로 채워 넣는다. 그 결과는 선동정치에 의해 커져버린 상호 적대감, 관련된 모든 상대에게 돌아가는 피해뿐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레그는 또 북한 문제는 “미국 정보국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되고 살아 있는 실패 사례”라며, 그 실패의 원인은 북한 지도자를 악마화한 데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는 주장이나 분석이 아니다. 1950년대 초부터 31년간 CIA에 몸 담았고, 백악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담당관과 부통령 안보보좌관으로 일했으며,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이의 목격담이다.
그러나 악마화는 미국 외교정책의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계산기를 두드려 봐서 필요 없다는 결론이 나면 언제든 거둬들일 수 있는 도구다.
예를 들어 아들 부시 대통령 시절 북한에 대해서만큼 강력했던 ‘미얀마 악마화’는 오바마 정부 들어 자취를 감췄다. 중국 견제라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 미얀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북한 악마화’가 계속되는 것 역시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레그라면 그렇게 해서 미국이 취하는 이익은 대체 무엇인지, 반대로 악마화를 포기하고 북한과 손을 잡을 경우 미국이 쥘 수 있는 이익은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역대 한국 대사 중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구도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인물"(문정인 연세대 교수)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레그라면.
황준호 기자 jhwang7419@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