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지널 전문의약품의 특허권이 만료된 경우에는 해당 의약품의 특정 색상과 모양이 일부 유사하다는 이유만으로 오리지널 의약품 제조사가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으로 복제약품(제네릭) 판매 중단을 요구할 수는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2부(재판장 이태수)는 거대 다국적 제약사인 글락소 등이 "'에어플루잘 포스피로500' 판매를 중단하라"며 노바티스 국내 자회사인 한국산도스와 안국약품을 상대로 낸 부정경쟁행위금지 등 청구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고 22일 밝혔다.
이번 사건은 글락소가 자사 천식치료제품으로 특허를 낸 오리지널 의약품 '세레타이드500'과 노바티스 제네릭 '에어플루잘 포스피로500'이 모두 보라색 흡입기용기로 유사하기 때문에 거래자나 수요자가 혼동할 수 있어 부정경쟁행위에 해당한다며 낸 소송이다. 천식치료용 흡입기용기색상인 보라색을 오리지널 제약사만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가 이번 사건의 핵심 쟁점이었다.
앞서 화이자가 한미약품을 상대로 '팔팔정'이 '비아그라'의 모양을 베꼈다며 상표권 침해금지 소송을 낸 적이 있지만 부정경쟁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법원이 직접 판단해 오리지널 제약사의 독점권을 부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와 함께 현재 영국과 독일, 스웨덴, 멕시코 등 전 세계적으로 이번 사례와 유사한 소송들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이번 판결이 일정한 기준을 제시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국외 천식치료제 업계에서는 법적 구속력을 가지거나 확립된 색상 분류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유효 성분과 효과에 따른 색상 분류가 존재한다는 것이 상당히 인지된 상태에서 치료제의 오용 방지와 환자 보호를 위해 색상 분류가 권고되고 있고 국내에서도 그와 같은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천식 등과 같은 호흡기질환은 호흡곤란을 동반함으로써 환자의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급박한 상황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급박한 상황에 이른 환자들에게 흡입기 색상만으로 유효 성분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할 필요성이 충분하다는 점 역시 이와 같은 경향이 존재함을 뒷받침한다"며 "따라서 보라색의 둥근 형태인 제품이 그 자체만으로 자사의 식별표지라는 글락소 주장은 이유 없다"고 판시했다.
이어 "국내에서 판매됐던 천식치료용 흡입기들 중에는 푸른색 계열과 붉은색 계열, 보라색 계열이 있고 글락소 역시 제품에 포함된 유효성분을 나타내는 푸른색과 붉은색을 함께 표시하면서 자사 제품의 보라색이 이들 두 색상을 혼합한 것임을 광고한 바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해당 의약품이 모두 전문의약품으로서 의사나 약사 등 의약관련 종사자들은 의약품 모양과 색깔의 유사성으로 의약품을 혼동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일반인들 역시 처방전에 기재된 제품의 이름을 중시하기 때문에 글락소와 노바티스 제품을 오인·혼동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글락소는 자사가 개발해 특허를 얻은 천식 및 만성폐쇄성질환 치료제 세레타이드를 2000년부터 국내에 독점적으로 판매해왔으며, 지난해 까지 국내 누적매출액 3820억원, 2013년에는 72% 상당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특허권이 만료된 뒤인 2014년 6월 한국산도스가 안국약품과 국내 공동판매계약을 체결하고 세레타이드 제네릭을 수입해 판매하자 소송을 냈다.
약사 출신으로, 이번 소송에서 노바티스를 대리한 법무법인 광장의 박금낭 변호사(사법연수원 31기)는 "오리지널 제약사가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권이 만료된 이후에는 함부로 시장독점권을 유지 남용할 수 없음이 법원에서 확인된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이번 판결의 의미를 설명했다.
노바티스 제네릭 '에어플루잘 포스피로500'(왼쪽)과 글락소 오리지널 '세레타이드500'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