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송강호의 연기를 평가하는 것 자체가 불손한 행위다."
영화 '사도'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이 한 말이다. 다소 과장된 발언 같지만, 영화 '사도'를 보면 충분히 공감할 만한 말이다. '변호인'에서 열연한 송강호는 '사도'를 통해 또 한 번 자신을 넘어선 듯했다.
송강호는 '사도'에서 아들을 죽인 왕 영조를 연기했다. 42세에 아들을 본 뒤부터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는 69세까지 총 27년의 영조가 그가 맡은 역할이다.
큰 아들이었던 효장세자가 죽고 9년 만에 얻은 귀한 아들이 총명하기 이를 데 없어 행복해 하는 모습부터,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들다 못해 기행까지 벌이는 아들을 결국 죽게 만드는 모습까지 송강호는 영조의 극적인 심리변화를 물흐르듯 표현해냈다.
영화 '사도'에 출연한 송강호. 사진/쇼박스
언론시사회 이후 개봉일인 16일을 넘기면서까지 '사도'는 극찬 세례를 받고 있다. 253년 전 나랏일을 집안일의 이야기로 재해석하며 세대간 갈등을 암시하는 메시지, 몰입도가 높은 이야기 흐름,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력 등 장점의 가짓수도 많다.
16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송강호는 극찬 세례 때문에 어깨가 뻐근하다고 했다. "칭찬을 정말 많이 해주시니까 더 긴장되고 부담이 됩니다." '설국열차', '관상', '변호인'까지 3연타석 홈런을 친 송강호가 네 번째 타석인 '사도'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들어봤다.
배우 송강호. 사진/쇼박스
◇"내 연기는 '커터'였다고 한다"
작년 4월 쯤 송강호가 '사도'에서 영조를 연기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당시 이준익 감독에게 송강호를 섭외한 이유에 대해 전화로 물었다.
"송강호가 왕 역할 하는 거 본 적 있나. 난 보고 싶다"라는 게 이준익 감독의 답이었다. "송강호가 왕을 하는 모습이 상상이 안 갔다, 그가 연기하는 왕이 궁금해서 송강호를 선택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 감독은 송강호와 작품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들떠보였다.
송강호는 '사도' 시나리오를 받고 7일 만에 캐스팅에 응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송강호에게 이준익 감독의 영화에 흔쾌히 출연하게 된 이유를 물었다.
"이준익 감독님의 따뜻한 시선이 작품에 녹아있는 게 좋았어요. 어찌하다 보니까 20년 동안 못 만났었어요. 날 싫어했는지 심지어 작품 의뢰도 없었고요. 하하. 시나리오를 읽고 분명 닳고 닳은 이야기인데 '정공법'이라고 해야되나, 사건을 꾸밈 없이 펼쳐내는 데 정말 좋았어요. 그래서 바로 하게 됐죠."
두 사람의 만남은 그렇게 이어졌다. 이후 이 감독은 송강호에게 "변화구 느낌의 연기를 할 것 같다"는 기대를 내비쳤다. 당시를 회상하며 송강호는 "'난 돌직구를 던지고 싶은데, 포수가 변화구를 요구하네'라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송강호는 근엄하고 무서운 영조를 원했다면, 이 감독은 기존과 다른 신선한 느낌의 영조를 원했다고도 볼 수 있다. 최근 이 감독은 송강호에게 "송강호의 연기는 커터였다"고 말했다. 커터는 야구에서 직구처럼 빠르게 들어오다가 끝에서 아주 살짝 꺾이는 변화구다. 메이저리그의 투수 리베라의 구종으로 유명하다.
결과적으로 송강호식 '커터' 연기는 이 영화에 특유의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사도'의 영조 역시 기본적으로 근엄하다. 자식이 못마땅할 때 매섭게 뜬 눈은 기존의 영조 이미지와 흡사한 대목이 있다. 하지만 송강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변주를 시도한다. "너 공부는 하고 싶니?",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무슨 입장이 되니"라고 말하는 장면이라든가, 기분 나쁜 말을 듣고 귀를 닦는 장면은 정통 사극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고독함과 외로움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왕이 화려할 것 같지만 또 외롭기도 할 것 같았어요. 영화를 봐도 다들 왕을 무서워만 하니 왕 입장에서는 속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런 근엄함이 직구였죠. 영화의 90%는 팩트예요. 정말 객관적인 자료가 많이 들어가있어요. 그런데 제 대사에 현대물에서나 볼 법한 말투가 있죠. 이게 변화구가 되는데, 어쩌면 이것도 직구일 수도 있어요. 왕이 꼭 근엄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 아니에요. 욕설도 있었을 거고 짜증도 냈을 거고요. 관객이 (전통적인 왕의 이미지에) 세뇌 당했을 수도 있다고 봐요."
이어지는 극찬에 흥행 기록은 따놓은 당상처럼 여겨지고 있다. 극찬의 중심에 선 송강호는 어떤 심정인지 궁금했다.
"흥행은 다다익선이겠죠"라며 가볍게 농담을 던진 그는 "스코어는 우리가 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뭐라 말하긴 힘들다. 가을에 마음의 양식을 쌓는 관객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솔직히 제대로 느끼려면 두세 번 정도 영화를 봐야하는데, 그 말은 차마 못하겠다"며 웃어보였다.
배우 송강호. 사진/쇼박스
◇"나도 사람인지라 부족하니까"
영화 '변호인'에서 송강호는 쉬 잊혀지기 힘들 정도의 열연을 펼쳤다. 그런데 '사도'에서 송강호는 '변호인'의 송강호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또 한 번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이 '연기 귀재'에게 매번 자신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없을까 궁금했다.
"어떤 연기를 해도 자기 연기는 부족해 보여요. 감독님이 대단하신 거지 내게는 그런 부담감은 없어요. 나태해진다고 해야 하나.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어요. 사람은 누구나 부족한 존재니까. 그래서 후배들한테도 부족한 게 당연하다고 말해요. 그게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요. 대신에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해요. 저라고 어떻게 매 작품마다 완벽하겠어요. 부족한 지점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고 보완하려고 하는 거죠. 결과가 좋으면 좋은 거고, 부족하면 부족한 거고요."
송강호의 데뷔 영화는 '초록물고기'다. 당시 "어디서 저런 깡패에게 연기를 시켰냐"는 말이 나돌 정도로 깡패가 본업인 줄 알았다는 사람이 많았다. 이어 '넘버3'에서도 그는 건달이었다. '우아한세계'에서도 조직 폭력배였다. '변호인'에서도 초반에는 속물 변호사였다. 서민적인 이미지를 넘어서서 아예 밑바닥 인생과 더 어울리는 이미지의 송강호가 왕을 연기한 것은 일종의 도전이다.
"배우가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배우마다 다 틀이라는 게 있잖아요. '관상'을 찍을 때도 '송강호가 사극은 처음 아냐. 어울리겠어?'라는 말이 많았어요. 또 왕을 한다니까 '왕이 어울리겠어?', 이러더라고요. 뭐야 진짜, 지들은 왕하고 전화해봤어? 하하. 그런데 그게 자연스러운 사고의 틀이라고 생각해요. 그 틀을 스스로가 깨고 도전하는 것이 배우의 기본적인 덕목이고요."
송강호의 다음 작품은 '밀정'이다. 관상가에서 변호사, 왕을 넘어 다음은 독립군이다. 실존인물을 연기할지 가상의 인물을 연기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송강호라는 배우에게 독립군이라는 단어는 또 다시 어색한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이제는 '어울리겠어?'보다는 '어울리겠지' 하는 생각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아닌 송강호이기 때문이다.
함상범 기자 sbrai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