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정혁기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의 축구장마다 '붉은 꽃'이 피었다.
지난 8일과 9일 각각 출전한 기성용(26·스완지시티)과 손흥민(23·토트넘) 또한 가슴에 붉은 꽃 그림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운동장을 누볐다.
그들의 상대 팀도 마찬가지였으며 감독들과 유명 인사들은 배지 형태의 붉은 꽃을 옷깃에 달고 나왔다.
붉은 꽃으로 물든 EPL 축구장은 경기 전 2분간의 묵념으로 붉은 꽃의 의미를 전달했다. 보통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 '편 가르기'에 몰두하곤 하는 축구장에서 그 2분 동안만은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붉은 꽃을 매만졌다.
이유는 하나였다. 포피데이(Poppy day)로 대변되는 '전쟁 추모'의 정신이 그들을 하나로 묶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일이자 영국의 현충일인 1918년 11월11일을 EPL 축구장이 잊지 않은 것이다.
이날 EPL을 수놓은 붉은 꽃은 양귀비(Poppy)를 상징했으며 관중석에는 '절대 잊지 않겠다(Never Forgot)' 등의 전사자를 애도하는 걸개가 걸렸다.
양귀비가 영국 현충일의 상징이 된 건 우연이었다. 1차 세계대전 중 캐나다 군의관 존 매크레이가 전장에 핀 양귀비꽃을 보며 '플랑드르 벌판에 서서(In Flanders Fields)'라는 시를 쓴 게 발단이었다. 젊은 병사들의 희생을 떠올리며 탄생한 이 시가 유행하면서 양귀비는 영국연방에서 전쟁을 추모하는 상징물이 됐다.
이 때문에 지금도 유럽 몇몇 국가들과 영국연방인 호주, 캐나다, 남아공 등이 양귀비로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다. 여기에 EPL 축구장도 매년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EPL의 포피데이를 비롯한 다양한 추모 문화는 과거 박지성(34·은퇴)이 맨체스터유나이티드(맨유)에서 활약할 때부터 국내에도 생생히 전해졌다. '뮌헨 비행기 사고(1958년)'나 '힐스보로 참사(1989년)'와 같은 가슴 아픈 역사를 곱씹는 추모식은 EPL의 대표적인 축구장 추모식이다.
각 구단은 그들만의 작은 역사 하나까지도 다채로운 방식으로 축구장에서 기억하고 있다. 특히 맨유와 리버풀은 지난 4월16일 세월호 사고 1주기를 맞아 "잊지 않겠다"며 구단 SNS로 국내 팬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는 사람이 많이 몰리는 축구장의 특성을 활용한 EPL의 특징이다. 축구가 삶의 일부이기에 가능한 문화이기도 하다.
EPL은 이런 문화를 통해 역사의식을 꾸준히 강조하며 축구가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설파하는 중이다.
영국 문화원의 고유미 공보담당관은 "포피데이가 되면 모금도 하고 그 모금한 사람이 양귀비를 달 수 있다. 지금 국내 영국 문화원에도 그 모금함이 있다"면서 "모인 돈은 유가족에게 전달되는 등 좋은 곳에 쓰인다"고 설명했다.
임정혁 기자 komsy@etomato.com
◇9일 새벽(한국시간) 영국 런던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5-2016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12라운드 아스널과 토트넘의 경기에서 경기 전 선수들이 1차 세계대전을 애도하는 '포피데이(Poppy day)를 맞아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토트넘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