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영화 '내 머릿 속의 지우개'에서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자를 보호한 배우 정우성이 또 한 번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김하늘과 함께 한 새 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를 통해서다.
기억상실증이 워낙 흔히 쓰이는 소재인 탓에 뻔한 전개와 결말이 아닐까 우려됐지만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최근 베일을 벗은 '나를 잊지 말아요'는 정우성과 김하늘의 시너지를 통해 진한 감성을 전달한다.
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 포스터. 사진/CJ엔터테인먼트
교통사고로 인해 최근 10년간 기억을 송두리째 잃은 대형로펌의 변호사 석원(정우성 분)은 경찰서를 찾는다. 그리고 경찰에게 "제 실종신고를 하고 싶습니다"고 말한다. 흔들리는 눈빛을 가진 정우성의 얼굴에서 리와인드(되감기) 되는 영화의 오프닝이 신선하다.
당연하다는 듯 집에 찾아온 친구의 이름은커녕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을 못하는 석원은 정신병원에서 우연히 진영(김하늘 분)을 만난다. 진영은 석원을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석원은 "나를 알죠"라고 묻지만 진영은 "모른다"고 말한 뒤 급히 자리를 뜬다.
석원을 뒤로 한 채 도망쳤던 진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석원의 주위를 다시 맴돈다. 술을 마시고 밤을 같이 보내는가 하면 만난 지 세 번째 날부터 석원에게 같이 살자고 조른다. 다소 불안해 보이는 진영의 요구에 석원은 '그러자'며 미소만 짓는다. 진영과 동거 중 석원은 조금씩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의 퍼즐을 맞춰나간다. 진영은 기억을 찾아가는 석원을 두려워한다.
석원은 결국 기억을 모두 찾아내지만, 기쁨의 미소를 짓는 대신 오열한다. 찾아낸 기억이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기억을 간직한 진영은 아파하고 있는 석원마저 다시 한 번 사랑하겠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영화는 진실한 사랑 앞에서 기억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 김하늘·정우성 스틸컷. 사진/CJ엔터테인먼트
이제 막 장편 입봉한 이윤정 감독의 장단점이 스크린 속에도 고루 드러난다. 기억상실을 소재로 삼았지만, 기억을 잃는 것보다 되찾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그린 점은 기존 영화나 드라마와 다른 대목이다. 과거의 기억보다 더 소중한 것은 미래라고 설파하는 듯한 시선이 독특하다. 다만 석원과 진영의 감정선이 촘촘하거나 매끄럽지는 않다. 두 사람의 감정을 조금 더 세밀하게 그려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에서의 폭발하는 감정신에서는 애틋함이 전달된다.
'비트'를 시작으로 '놈놈놈'을 비롯해 어떤 영화에서든 멋있는 남자로 나오는 정우성은 이번 영화에서도 완벽한 남자로 나온다. 진영의 지나친 투정에도 흔들림 없이 그녀의 머리를 매만지며 미소를 짓는 정우성의 얼굴은 판타지에 가깝다. 정우성은 남자다운 멋이 가득한 석원이라는 캐릭터에 동정심을 유발시킬 만한 여지도 남겨둔다. 완벽해 보이지만 어딘가 보호해주고 싶은 석원은 정우성에게 '맞춤 옷'처럼 여겨진다. 이번 영화로 정우성은 또 한 번 여성 관객들의 마음을 훔칠 것으로 보인다.
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 정우성 스틸컷. 사진/CJ엔터테인먼트
'블라인드' 이후 5년 만에 관객과 만나는 김하늘은 더욱 감성 짙은 연기를 선보인다. 김하늘은 불안함을 내재하고 있는 진영에 현실감을 불어넣는다. 매 작품마다 여성적인 매력을 선보이며 '멜로퀸'으로 불리는 김하늘은 이번만큼은 평범한 여인으로 정우성의 매력을 살리는 데 일조한다.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답답함을 절제된 연기로 표현한다. 정우성이 한 없이 멋있을 수 있는 배경에는 김하늘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이 영화는 사랑 앞에서는 기억상실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과거에 대한 집착보다 현재의 사랑이 더 의미 있다고 말한다. "남에 대한 무관심이 팽배한 현 시대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애틋한 것인지 말하고 싶었다"는 이윤정 감독의 의도가 드러난다. 몇 가지 아쉬움은 있지만, 오랜만에 진한 감성을 전달하는 '나를 잊지 말아요'는 관객들의 마음을 녹일 영화가 될 것으로 보인다.
상영시간은 106분, 개봉은 1월 7일이다.
함상범 기자 sbrai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