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날 수 있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 가능 사회

입력 : 2016-04-05 오후 5:15:06
공연의 2막이 오른다. 화려한 분장을 한 주인공이 나타난다. 그 옆을 걷고 있는 행인1, 2, 3. 이 행인들을 '우리들'이라 하자. ‘우리들’은 비장애인들이다. 이 사지 온전한 이들을 한 곳에 몰아넣어 하나의 제국을 세우는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그런데 이 가상의 제국은 뭔가 수상하다. 몸이 굽어진, 목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사람들이 이 제국을 지배한다. 이따금 한번 와 우리들을 목욕시킨다. 옆에서 카메라를 비추며 ‘천사 같은 비장애인들’이라는 칭찬을 한다. 이 기형의 몸을 가진 이들은 묻는다. "당신은 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받은 비장애인들은 벙찐다. 우리는 날 수 있는가? 
 
사진/바람아시아
 
장애인문화예술 판의 ‘그들이 다스리는 세상’의 한 장면을 재구성해보았다. ‘당신은 날 수 있는가’ 라는 극 중 대사는 오랫동안 머리를 어지럽힌다. 이 장면은 어떤 의미일까. 장애인문화예술 판 좌동엽 대표에게 이 장면의 기획의도를 들어보았다. “장애인 등급의 문제점을 풍자한 장면이에요. 장애인 등급제도는 사실상 예산 감축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에요. 등급 심사표가 있는데 그 평가 지표가 많이 왜곡되어 있어요. 예를 들면 ‘대소변을 혼자 해결할 수 있는가’와 같은 항목에서 실제 중증 장애인들이 중증 장애로 판정받기 힘든 불가능한 기준을 설정해 놓거든요. 대소변을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인데도 요의를 느끼기만 하면 1급 판정을 받지 못해요. 1급 판정을 받아야만 활동보조를 지원받을 수 있거든요. 중증장애인들이 자신이 중증임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 온 거죠. 그 상황을 역으로 바꿔 풍자를 시도했어요. 비장애인들에게 ‘당신은 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비장애인들은 비장애 1급을 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죠. 장애 등급제는 장애등급을 떨어뜨려 복지 예산 지출을 줄이려는 시도에요.” 
 
사진/바람아시아
사진/바람아시아
장애인 복지라는 보기 좋게 노릇하게 구운 파이는 사실 속이 시꺼멓게 타버렸다. 장애등급제는 예산의 효율적인 분배라는 허울을 썼지만 재심사를 통해 예산을 절감한다. 실제로 한국장애인개발원의 ‘2015 장애통계연보’에 따르면 OECD 주요국 중에 한국의 GDP 대비 장애인복지지출은 0.49%로 최하위권에 속한다. 경기 부양 효과가 입증되지 않은 통 큰 부자 감세와는 달리 사회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은 유달리 팍팍하다. 아주 작은 파이를 나눠 먹기 위해 장애인들은 장애등급을 높이려 몸부림치고 있다.
 
또한 장애인 등급제의 가장 큰 문제는 낙인화이다. 물론 비장애인들 사이에서도 암묵적인 ‘급 문화’가 있지만 등록증 발급을 통해 명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장애인 등급제는 장애인을 정책의 효율적 집행을 위해 장애 정도를 판별해 내야 할 대상으로 지정하는 것이다. 단지 장애 정도에 따른 장애 등급 부여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장애 등급에 따라 받을 수 있는 복지 서비스도 제한되어 있다. 이는 극단적 타자화의 결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를 격리할 뿐만 아니라 장애인들 사이 계급 갈등 또한 조장한다.
 
사지 온전한 ‘우리들’의 세상에서는 장애인들은 끊임없이 제삼자로서 도구화되고 있다. 장애등급제 문제뿐만 아니라 매스컴 방영에서도 같은 문제는 되풀이된다. “매스컴에서 장애인을 천사의 이미지로 종종 묘사해요. 장애인 시설 이름에도 ‘천사’가 많이 들어가고요. 그런 이미지 구축은 대중들의 감정을 자극해 후원금을 많이 걷으려는 전략이죠. 착하고 천사 같다는 말 자체가 문제는 아니에요. 장애인이 나쁘고 게으를 경우 기존 이미지와 괴리가 생겨 더 많은 비판을 받죠.  또한 장애인을 언급 할 때 헬렌 켈러와 같이 불굴의 의지를 갖추고극복해낸 경우를 많이 언급해요. 이러면 또 드는 의문점은 장애인은 무조건 악착같이 살아야 하나. 중요한 점은 장애인도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이라는 거죠. 개개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이미지로 장애인을 많이 일반화하죠. 또 예전에 많은 문제가 되었던 ‘장애우’도 같은 문제에요. 장애자에서 장애인으로 명칭을 바꾼 것은 의미 있는 움직임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친구로 부르는 건 지나친 배려죠. 이런 의식적인 도구들이 장애인 차별 의 밑바탕이 되는 거에요.”
 
일제강점기 당시 손가락질받으며 격리된 한센병 환자들이 모인 소록도의 짙붉은 설움의 소리가 들려온다. ‘당신들의 천국’에서 이청준 작가에 의해 묘사된 최종의 소록도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화합의 섬이다. 매년 임명되는 소록도 병원의 원장은 ‘우리들’의 천국을 꿈꾸지만 매번 실패에 그치고 만다. 다른 운명에 놓인 ‘정상인’인 원장과 한센병 환자들은 결코 한 지점에서 만날 수 없다. 즉 운명이 서로 다른 개체는 하나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당신들의 천국’의 결론처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스며들 수는 없을까? 서로 진정한 교감을 나눌 수 없을까? 
 
“극단을 만든 이유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의 적대감을 해소하기 위해서예요. 단순한 인식개선이라는 상투적인 문구는 한계가 있어요. 예를 들면 ‘장애인을 사랑해야 한다’, 이런 말은 불가능한 말이에요. 살아온 삶 자체가 다른데요. 우리 극단에서는 장애인들이 장애인 역할을 맡고 비장애인들이 비장애인 역할을 맡아요. 장애인극단인 만큼 장애인이 주연을 맡죠. 같이 공연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서로에 대한 적대의식을 해소하고 있어요. 또한 관객들은 볼품없다고 생각했던 장애인의 몸짓에 충격을 받죠. 마음의 충격은 그 어떤 다큐멘터리 방영보다 인식 개선 효과가 커요. 비장애인이 장애인 역할을 하는 예도 있죠. 하지만 장애인이 자신의 삶을 연기할 때 그 충격은 극대화되죠.”
 
공연의 막이 내린다. 조명도 같이 꺼지며 어두워진다. 다시 전체 조명이 켜지며 무대는 밝아진다. 무대 위 조명은 영원히 한 사람만 비추지 않고 계속 밝지도 꺼지지도 않았다. 이 조명은 무대 어디를 비출지 모른다. 우리는 항상 무대 조명 안에 있을 수 없다. 조명 밖의 사람을 배척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배척하는 것과 같다. 또한 ‘우리들’ 대부분은 어쩌면 모두 조명 밖의 사람들이다. 비장애인들의 ‘우리들의’무대에서 장애인들은 항상 조명 밖이다. 그리고 ‘그들은’ 고립된 섬을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한다. 시설 밖의 하나의 인간으로서 욕망, 시기, 질투와 같은 원초적인 감정을 몸짓으로 표현한다. 중요한 건 우리 그 누구도 내일 당장 조명 밖으로 내쳐질 수 있다. 
 
“장애인의 타자화가 지속되는 한 우리 사회는 지속될 수 없어요. ‘장애인’을 차별하는 행위는 우리를 차별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도 어디에서는 약자이자 을이죠. 우리가 차별받지 않기 위해서 남을 차별하지 않는 거에요.” 우리도 다양한 빛줄기에 의해 조명 안과 밖을 넘나든다. 즉 여러 사회적 기준에 따라 우리는 ‘우리들’과 ‘당신들’를 오고 간다. ‘우리들’과 ‘당신들’의 대립은 그 경계선을 없애지 않는다면 지속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의미를 확장해야 한다. 비장애인인 ‘우리’가 항상 ‘우리들’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김리은 baram.asia  T  F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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