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테헤란의 박근혜, 서울의 박근혜

입력 : 2016-05-03 오후 2:55:31
이란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2일 히잡의 일종인 ‘루사리’를 쓰고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를 면담하는 장면은 역사적인 것이었다. 1962년 양국 수교 후 54년 만에 처음 이뤄진 한국 대통령의 방문이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란이 어떤 나라인지를 따져보면 양국관계의 새 시대를 여는 순간이었다.
 
지난해 핵협상 타결 후 서방의 제재가 풀려가고 있지만, 이란은 30년 넘게 세계 최강의 반미국가였다. 지금도 여전히 미국과 대립하는 나라다. 박 대통령과 하메네이가 만나던 순간에도 이란 국영TV는 하메네이가 미군의 페르시아만 주둔을 비난하는 연설 장면을 내보냈다. 하메네이는 그 연설에서 “(미군은) 피그스만으로 돌아가서 훈련하라. 여기는 우리 땅이다”라고 쏘아붙였다.
 
이란은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하다. 1980년대 이라크와의 긴 전쟁 기간 동안 북한에서 26억달러 상당의 무기를 도입했다. 1989년 하메네이는 이란 대통령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기도 했다. 북한과 이란의 미사일 협력은 오래된 얘기고, 현재 진행형이다. 하산 로하니 대통령이 박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한반도에서 평화를 원한다. 세계 안보를 위협하는 어떤 핵개발도 반대한다"면서도 북한을 특정하지 않은 것은 다분히 북한을 의식한 태도로 풀이된다.
 
또 이란은 이스라엘과 견원지간, 아니 ‘철천지원수’ 관계다. 이렇게 보면 이란은 박 대통령의 중요한 지지기반 중 하나인 보수 기독교인들이 싫어할 만한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다. 그런 나라를, 자신들이 표를 줘 당선된 박 대통령이 방문해 무슬림의 상징인 히잡을 쓰고 다닌다니 여간 혼란스러운 게 아닐 것이다.
 
박 대통령의 외교적 파격은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해 9월 중국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행사에서 인민해방군 열병식을 참관한 것도 역사적인 장면이었다. 박 대통령이 오른 천안문의 성루는 1954년 10월 당시 김일성 북한 수상이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과 함께 중국 건국 5주년 기념 열병식을 지켜보며 북·중 ‘혈맹’을 과시했던 장소였다. 그로부터 61년이 흐른 2015년 북한의 지도자가 아닌 한국의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중국 국가주석과 함께 열병식을 본 것이다.
 
테헤란의 박 대통령은 상대방의 문화를 존중할 줄 아는 문화상대주의자였다. 국내정치적인 이익이나 미국과의 관계보다 인구 8000만의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더 중시하는 실용주의자이기도 했다. 베이징의 박 대통령도 멀리 보는 외교전략가였다. 중국의 부상으로 동북아의 판도가 변했음을 알고 새로운 한·중관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리얼리스트였다. 야당들이 박 대통령의 이란 방문에 대해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중국 열병식 참석 발표 때는 야당들이 환영논평을 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묻고 싶다. 박 대통령은 왜 서울에서는 그리하지 않는가. 국민들이 총선을 통해 ‘박 대통령의 길은 틀렸다’고 심판했는데 왜 기존의 길을 고집할까. 그리고 왜 북한에 대해서는 이란이나 중국을 대하듯 유연하게 하지 못할까. 개성공단 중단으로 정작 피해를 보는 쪽은 남측기업들인데 왜 명분에 집착해 자해적인 조치를 유지하는 것일까. 테헤란의 박 대통령을 보는 보수 기독교인들만큼 서울의 박 대통령을 보는 나도 혼란스럽다.
 
황준호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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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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