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강남역 여혐 살인, 정치의 책임 무겁다

입력 : 2016-05-19 오후 2:15:33
“묻지마 살인이 아니고 여성혐오 살인이다.”
 
18일 하루 트위터는 공포로 가득했습니다. 참담함과 분노가 교차했습니다. 강남역 10번 출구 노래방 화장실에서 벌어진 끔찍한 여성혐오 살인에 대한 18일 하루 언급량만 80만건이 넘었습니다. 연관어 최상위엔 ‘여혐’ ‘여성혐오’라는 키워드가 자리했습니다.
 
살인 피의자가 ‘여성이 나를 무시해서’라고 범행동기를 분명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언론은 ‘묻지마 살인’이라는 자극적인 프레임으로 이 사건을 묘사했습니다. 심지어 한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여성혐오를 너무 강조하면 이 사건의 본말이 전도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고까지 했습니다. 정말 본말이 전도된 진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트위터에는 ‘묻지마’ 규정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습니다. ‘정신병자의 묻지마 살인’이라는 규정은 이 사건의 본질을 회피하거나 은폐하려는 남성중심 이데올로기가 작동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사건의 본질을 명확히 해야 문제 해결에 조금이라도 다가설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 여성비하, 성폭력 등은 이미 위험수위를 넘은지 오래됐지만, 남성중심의 사회의 지배자들은 이 문제를 극도로 회피해 왔습니다. 심지어 여성혐오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부풀려 사회갈등을 조장한다는 비난까지 감수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러니까 여성은 밤 늦게 돌아다니면 안 돼'라고 말합니다. 남자친구는 ‘모든 남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살인자의 책임을 묻는 척 하다가 순식간에 피해자의 책임을 강조하기 시작합니다. 남성들이 ‘책임으로부터의 도피’에 열중하는 동안 여성들의 공포는 가중됩니다. 한 트위터 이용자가 올린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고, 술을 마시다가 잠깐 화장실에 갔을 뿐인데 23살 학생은 어깨와 가슴을 수 차례 흉기에 찔려 살해 당했습니다. 이번 일이 조용히 넘어간다면 다음은 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라는 트윗은 2만회 가까이 리트윗됐습니다.
 
우리 사회는 ‘다음은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이 극단의 공포 앞에서 왜 이렇게 무기력한 걸까요? 또 한 트위터 이용자는 “지금 올라오는 기사들 대부분이 ‘여자가 무시해서’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마치 여자가 얼~마나 무시를 했으면 목!사!를! 꿈꾸던 선량한 신학과 학생이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다ㅠㅠ라는 뉘앙스...진심으로 토 쏠릴 만큼 역겹다”고 한탄했습니다. 살인한 남자의 꿈은 공공연히 적시하면서 23살 피해 여성의 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이 기이한 현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통찰력으로 가득한 책 <정치는 뉴스가 아니라 삶이다>에서 저자 스기타 아쓰시 호세이대학 법학부 교수는 “지금 세계 정치는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없게 된 현실에서 쉽게 내부 공격으로 돌아서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최근 한국사회는 대중의 절망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적대감으로 악용하는 문화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여성혐오는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청년실업, 불평등 심화 등 사회경제적 불안을 겪고 있는 대중이 정치를 통한 구조적 해결로 나아가지 못하고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한 적대감으로 이를 해소하려는 현상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혐오는 매우 본질적이고 주류적인 현상입니다. “남성들의 공포는 ‘더치페이 하지 않는 것’ 여성들의 공포는 ‘살해당하는 것’”이라는 진술이 문제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올해 초 더불어민주당 의뢰로 ‘여성정책 소셜 빅데이터 분석’을 했을 때 ‘여성’ 키워드는 ‘경제’ ‘통일’ ‘일자리’ 등 다른 주요 키워드들을 제치고 압도적 1위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여성혐오’ 키워드는 3년 동안 무려 21.6배나 급증했습니다.
 
그러나 정치는 여성혐오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이를 적극적으로 의제화하려는 노력도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진선미 의원이 여성에 대한 극단적인 폭력사이트인 소라넷 서버 폐쇄를 주도한 것이 기억에 남는 정도입니다. 여야가 모두 경제와 민생을 말합니다.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스기타 아쓰시 교수가 지적하듯이 ‘경제에 의한 정치 식민지화’가 진행될 수록 정치의 역할이 점점 축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는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해소라는 시대정신을 중심에 두고 우리 사회의 차별과 혐오에 맞서 단호히 싸워야 합니다.
 
여성혐오, 장애인혐오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문화 극복에 정치가 앞장서야 합니다. 남성들에 의한 폭력적 담론과 범죄를 끝내야 합니다. 저를 포함한 남성들에게 호소합니다. 지금 이 순간 무의식적으로라도 피해자인 여성의 책임을 떠올린다면 문제가 아주 심각한 겁니다. 정치권과 언론을 비롯한 우리 사회는 여성혐오 금지 특별법 같은 것을 심각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혐오는 이미 표현의 자유의 경계를 넘고 있습니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우리 사회의 종합적인 성찰을 요구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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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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