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기자] 삼성 지배구조 개편 작업이 난관에 봉착했다. 경영권 승계와 맞물리며 속도를 내던 지주회사 체제 전환이 20대 국회의 지형 변화 속에 한걸음 쉬어야 할 처지에 직면했다. 지배구조 정점에 위치한 삼성물산도 주가 하락에 더해 제일모직 합병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르면서 추후 구조 재편 작업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도 대두된다. 이래저래 삼성의 부담은 가중됐다.
끝난 줄 알았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이 논란을 촉발시켰다. 31일 서울고등법원은 지난해 양사의 합병 과정에서 있었던 삼성물산 주식매수청구가격이 너무 낮다며 가격 조정을 신청한 사건에서 1심과는 달리 일성신약과 소액주주들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따라 지난해 엘리엇 사태로 뜨거웠던 논쟁이 재차 불거질 조짐이다.
특히 재판부는 삼성그룹 총수일가의 이익이 되도록 삼성물산 주가를 의도적으로 낮췄을 수 있다며 합병의 정당성을 문제 삼았다. 재판부는 "삼성물산 실적 부진이 삼성가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에 의해 의도됐을 수 있다는 의심에는 합리적 이유가 있다"고 밝혔다. 이 같은 판단은 일성신약이 제기한 삼성물산 합병 무효소송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삼성물산 측은 이에 대해 "전혀 사실과 다르다"며 재항고할 뜻을 밝혔다.
재판부는 삼성물산 주식을 꾸준히 팔아 주가를 낮춘 국민연금에 대해서도 정당한 투자 판단이 아닌 것으로 의심된다고 지적했다. 최근 기관투자가의 적극적인 경영감시를 요구하는 사회 기조에 불을 지피는 판단이다. 대법원에서 2심 결정이 그대로 확정되면 그룹 재편 작업은 정당성 문제로 잦은 충돌이 야기될 것이 확실시된다.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은 삼성생명의 삼성카드 지분 인수 등 연초까지 활발했지만 최근 곳곳에서 암초를 만났다. 우선 삼성물산의 실적 부진과 연일 계속되는 주가 하락이 부담이다. 백기사로 나섰던 KCC에 대한 부담도 더해졌다. 지주사 역할을 하는 삼성물산은 지배구조 강화를 위해 삼성전자 등 계열사에 대한 지분 확보가 요구된다. 삼성전자의 경우 이 부회장의 지분이 0.6%에 불과하다.
때문에 재계 안팎에서는 삼성물산과 삼성전자 간 분할 합병안이 지속 제기돼 왔다. 하지만 현재 삼성물산의 시가총액은 약 22조원으로 183조원의 삼성전자와 정상적인 합병이 불가능하다. 그간 제일모직 합병 등을 통해 삼성물산의 몸집을 키워 왔지만 역부족이다. 대신 사업회사 분할을 통한 우회로는 살아있다. 이와 함께 삼성물산 실적 부진은 이 부회장의 경영능력에 대한 검증이 필요한 부분에서 부담이 된다.
삼성생명의 카드 지분 인수와 금융 계열사들의 자사주 매입 등은 금융지주회사 전환 작업으로 해석됐지만, 이를 위한 법 개정이 막막하다. 공정거래위원회가 19대 국회에서 중간금융지주회사 허용을 추진했으나 결국 무산됐다. 여소야대의 20대 국회에서는 법안 통과 가능성이 더욱 낮아 보인다.
특히 경제민주화를 내세운 거대 야당은 기존 순환출자 해소 등을 공약으로 내걸어 20대 국회 내내 삼성 지배구조의 잠재적인 리스크가 될 수 있다. 이에 따라 지주회사 체제 전환이 필요하지만 금산분리법에 따라 삼성생명이 보유 중인 삼성전자 지분을 매각해도 지배구조에 문제가 되지 않으려면 중간금융지주회사 허용이 선행돼야 한다.
지배구조 개편에 대한 규제, 감시 기능도 강화되고 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진행하고 있는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 개정안에는 ▲지배주주가 다른 주주에게 손해를 끼친 경우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이사회는 경영승계에 관한 정책을 공시해야 한다 등 재벌 규제 강도를 대폭 높이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삼성에 대한 지역 투자나 구조조정 계열사 지원 등 대외 압박도 심해지고 있다. 전라북도는 30일 삼성이 새만큼 투자를 철회한 데 대해 강한 목소리로 질타했다. 정동영 국민의당 의원 등 야당 의원들도 투자 양해각서 체결의 진실을 밝히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광주에서는 총선 공약이었던 삼성전자 전장사업 투자 여부를 두고 논쟁이 끓고 있다.
금융당국이 삼성중공업의 최대주주인 삼성전자의 지원을 요구하는 등 부실 계열사에 대한 지배주주의 책임론도 거세지고 있다. 이 부회장이 책임경영 차원에서 자사주를 매입한 삼성엔지니어링은 실적 부진이 다시 불거지면서 이달 들어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승계 이전에 해결해야 할 난관이 적지 않은 상황이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