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삼성전자는 사내 창업지원 조직인 C랩에서 만들어진 스타트업 5곳을 독립시켰다. 허리둘레와 활동량을 측정해 비만을 막아주는 스마트벨트, 메모나 아이디어를 포스트잇에 출력하는 프린터 등이 C랩 출신 스타트업의 제품이다. 삼성전자 이외에도 LG전자와 아모레퍼시픽 등 다양한 기업들이 사내 스타트업을 육성하고 있다. 구글이나 시스코, 제너럴일렉트릭(GE) 등 글로벌 기업들이 시행한 사내 스타트업 육성 문화가 국내에도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기업 내부에서 사내벤처와 같은 스타트업을 육성하면 민첩하게 혁신을 도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경직된 기존 대기업 문화 아래서는 스타트업을 키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삼성전자가 창의적 기업문화 확산과 유망 스타트업 배출을 위해 추진주인 C랩에서 5개 과제가 독립 기업으로 출범한다. 최근 사내 스타트업은 기업의 혁신을 위한 새로운 방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뉴스토마토 원수경기자] 구글의 비밀연구소라는 별칭이 붙은 '구글X'는 혁신의 심장부다. 사람을 달에 보낼 만큼 혁신적인 문샷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곳이기도 하다. 자율주행차를 비롯해 대형 풍선을 통한 인터넷 공급, 의학 분야 혁신을 통한 암 정복 등이 이곳에서 연구되고 있다.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도 구글X를 통해 탄생했다. 이곳은 다양하고 새로운 연구가 이뤄지는 곳이라는 뜻에서 '인큐베이터'라고 불리기도 한다. 구글 내부의 스타트업 양성소라고 볼 수 있다.
구글X는 구글이 다른 기업보다 혁신적이라고 평가받도록 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는 "다른 기업들은 하나의 혁신적인 전략에 의존하지만 구글은 한 번에 수십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며 복잡한 혁신 생태계를 만들고 있다"고 평가했다. 구글X의 혁신적인 실험이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적극적인 인수합병에 있다. 구글은 초기 스타트업을 쓸어담듯이 인수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기업이 필요한 스타트업을 외부에서 쉽게 사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빠르게 변하는 시장 환경에 민첩하게 대응하고 미래 산업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회사 내부에서 스타트업을 키워야 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GE의 혁신 비밀은 '내부 스타트업'
제너럴일렉트릭(GE)은 미 증시에 상장된 기업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다. 스타트업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현재 GE 내부에는 500여개에 달하는 소규모 별동조직이 스타트업처럼 운영되고 있다.
포춘과 HBR 등에 따르면 GE가 내부 스타트업 육성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1년부터다. 당시 제프 이멜트 GE 회장은 "소프트웨어 회사로 변화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한 바 있다. 가전제품과 비행기 엔진을 만들던 GE로서는 환골탈태에 가까운 변화를 예고한 것이다. 성공적으로 변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많았지만 GE는 지난해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약 50억달러를 벌어들이며 체질개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빠른 변화를 가능케 한 것은 회사 내부에서 키운 스타트업들이었다.
먼저 GE는 내부의 소프트웨어 스타트업을 적극 지원하기 위해 본사와 멀리 떨어진 실리콘밸리 인근에 업무공간을 마련했다. 본사 건물에서도 벽을 허물어 소통을 강조했다. 이멜트 회장이 식당으로 쓰던 곳에는 소파와 화이트보드 등을 가져다 놓고 자유롭게 회의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변화가 시작되고 15개월 만에 GE는 내부 스타트업 500개에 자금지원을 결정했고 혁신코치 500명을 고용해 스타트업을 도왔다. 각 스타트업에는 90일안에 시제품을 만들어오도록 했다. 이른바 GE의 '패스트워크(FastWorks)' 경영전략이다. 빠른 속도로 시제품을 만들고 시장반응을 살펴 제품에 즉각 반영해 완성도를 높이는 스타트업의 전략인 '린 스타트업(Lean Startup)'을 GE 식으로 적용한 것이다. 포춘은 "패스트워크 전략은 GE 임원들이 리스크를 감수하고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질문하도록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떠나가는 직원 잡는 복안되기도
기업 내 스타트업은 기본적으로 혁신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스타트업으로 떠나가려는 인재를 붙잡아두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포브스 등은 얼마 전 구글이 회사 내부에서 스타트업 발굴을 위한 인큐베이터 조직인 '에어리어120'을 직접 가동키로 했다고 보도했다. 회사 안에 기업가 정신을 확산시키는 것과 동시에 우수한 구글러(구글직원)들이 창업을 위해 회사를 떠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로 풀이됐다.
에어리어120에 참여하기 원하는 구글러는 사업계획을 작성해 프로젝트 참가 신청을 하면 된다. 참가신청이 확정되면 해당 팀은 몇 개월 동안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는 일을 전업으로 할 수 있으며 이후에는 구글의 투자를 받아 직접 창업을 할 수도 있다.
에어리어120은 구글의 '20% 프로젝트'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20% 프로젝트'는 업무시간 중 20%는 자신이 원하는 프로젝트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한 제도로 이를 통해 지메일(Gmail)이나 에드센스, 구글뉴스 같은 구글의 대표 서비스들이 탄생했다.
또한 구글의 실험실인 구글X나 대학을 갓 졸업한 직원을 대상으로 한 인재 발굴 프로젝트인 '제휴제품매니저(APM)'와 비슷한 프로그램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구글이 지난해 지주회사인 알파벳 체제로 전환하면서 사업영역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에어리어120이 구글X 등과 함께 신사업 발굴에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했다.
조직보다 '개인' 중시하고 역할구분 없애야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대기업이 많아졌지만 이는 쉬운 작업은 아니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업무 방식에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강진구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거대 기업 안에 스타트업을 키우려면'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대기업 내에서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구체적인 조언을 제시했다.
우선 조직의 시스템보다는 개인의 역량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교한 시스템을 갖춘 거대조직은 효율성은 높지만 개인의 창의력을 저해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승부해야하는 스타트업은 시스템보다는 사람에 더 초점을 둬야 하는 것이다. 강 연구위원은 "스타트업은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아날로그적 특성이 강한 조직"이라며 "새로운 팀을 해당 직무 경력자로만 구성하지 않는 구글의 원칙은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조직 구성원 사이에서 역할을 따로 나누는 것도 스타트업에서는 지양해야할 일이다. 강 연구위원은 "역할을 구분하는 것은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지만 스타트업은 한 사람 혹은 하나의 팀이 한 아이템에 대해 A부터 Z까지 책임져야 하는 조직이라 서로 책임을 논할 여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역할을 구분하고 제한하면 창의성과 유연성을 가로막을 가능성도 있다.
GE의 내부 스타트업 조직 중 하나인 PET/CT 스캐너 개발팀은 지난 2014년 8월 구성될 때부터 엔지니어와 마케터, 디자이너 출신 직원들이 함께 했지만 역할 구분은 없었다. 모두가 함께 모여 아이디어 브레인스토밍을 했고 시제품을 만들고 피드백에 따라 수정해나갈 때에도 일의 구분이 없었다. 이들은 경계 없는 실행 중심의 접근법을 통해 제품 개발기간과 소요비용을 절반 가까이 줄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사람을 키울 여력이 없는 스타트업 조직의 특성상 인재 채용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보상 부분에 있어서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더 신경써야 한다. 강 연구위원은 보통 기업들이 하듯 성과 보상 테이블을 만들고 해당 틀 안에 모든 사원의 보상을 맞추면 특급 인재의 동기를 꺾고 회사를 떠나가게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평가보상의 불완정성을 인정하고 분배의 공정성이 아니라 절차의 공정성에 힘을 쏟아야 한다"며 "정확하게 평가하려는 게 아니라 수긍할 만한 평가를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스타트업이 성공하면 '사장'이 될 수 있다는 동기를 심어주는 것도 인재 관리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스타트업, 대기업 안이 오히려 유리"
흔히들 스타트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배수의 진을 치는 절박함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강 연구위원은 "스타트업은 대기업 안이 오히려 유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근거로 란제이 굴라티 하버드경영대학원 교수가 제시한 스타트업의 지속 성장 조건을 제시했다. 굴라티 교수는 스타트업이 1차 성공 이상으로 크기 위해서는 ▲전문적 역할 규정 ▲새로운 관리체계 ▲체계적인 기획·예측 ▲창의적인 기업문화 유지 등 4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4가지 조건 중 창의적 기업문화를 제외한 3가지는 모두 대기업이 이미 갖추고 있는 요소다. 관리체계를 제외하더라도 대기업 내 스타트업은 직원 월급이나 복리후생에 대한 걱정, 초기 자본투자의 부담이나 실패에 대한 부담 등이 적다.
강 연구위원은 "대기업 내 스타트업을 키워내는 일은 1차 성공까지가 핵심"이라며 "거대한 고정관념에 둘러싸여 있는 사업 방식, 조직운영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기존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시도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원수경 기자 sugyung@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