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인디’, 음악 하는 이요셉

협동조합 바람

입력 : 2016-06-14 오후 5:30:09
인디문화란 ‘돈을 버는 상업적 목적에서 벗어난 문화’를 뜻한다. ‘인디’는 초기 인디펜던스(Independence·독립)이라는 한정적 의미에서 벗어나 인디비주얼리티(Individuality·개성), 인디프런트(Indifferent·무관심한), 인디비주얼(Individual·개인) 등 개성있는, 남들의 시선에 무관심한(당당한) 개인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재능, 인력, 대학, 예술... 모든 것이 재화적 값이 매겨지고 상업화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인디’들은 어떻게 보면 악동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시대정신을 거스르는 혁명가같기도 하다. 인디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가치를 위해, 왜 인디의 삶을 사는지 음악하는 인디, 이요셉을 만나봤다.  
 
사진/바람아시아
 
이른 아침, 둘 다 퉁퉁 부은 얼굴로 마주 앉았다. 초면에 부은 얼굴로 서로를 마주하는 게 어색해 다짜고짜 노래를 부탁했다.
 
“혹 쉽지 않은 현실에 니가 무력할 때도, 힘을 낼 수 있도록, 일어설 수 있도록, 얼마남지 않은 내 삶이 짐이 되지 않도록 너를 위해서 내가 조금 더 큰 나무가 되리...”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소재로 만들었다는 곡 ‘나무’.
이요셉이 노래를 시작하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낮고 강한 목소리에 주변 모든 것이 멈추고 온몸의 감각이 집중했다.
 
아…. 범상치 않은 친구를 만났구나.
 
안성은 ‘도농복합시’라며 고향을 소개하는 이요셉으로 말할 것 같으면, 홍대나 이곳저곳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22살의 어린 싱어송라이터이다. 벌써 편곡까지 완성한 자작곡이 17곡. 최근 ‘헤이미쉬’라는 프로젝트 앨범에도 참여한 이요셉의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영화 같다.
 
음악은 어떻게 시작했나?
요셉_ 지금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는 항상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나마 초등학생 때는 살이 많이 쪄서 골목대장도 했는데 크면서 살이 빠지더니 정말 평범해졌다. 그러다 친구들이랑 노래방에 갔는데 내가 노래를 얼추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노래방에 정말 열심히 다녔다(웃음).
고등학교 1학년 수련회에 장기자랑에 혼자 패닉의 정류장을 불렀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다. 정말, 매번 말할 때마다 민망한데, 그 날 이후 학교에서 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희열을 느꼈다. ‘아 음악이 날 특별하게 만들어주는구나.’ 그래서 시작했다. 그리고 더 노력했다. 축제 때마다 새로운 걸 보여주려고.
 
자작곡은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나?
요셉_ 고등학교 1학년 말 때쯤 좋아하는 친구가 생겼다. 첫사랑이었다. 그때부터 사운드 클라우드에 자작곡을 만들어 올렸다. 그 친구랑 잘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내 노래의 60%는 그 친구에 대한 노래였다.
 
그렇게 지금까지 솔로로 음악 생활을 한 건가?
요셉_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회 친구들이랑 밴드를 결성했다. 나는 어쿠스틱 기타랑 보컬을 맡고 피아노, 드럼, 베이스 이렇게 ‘미스터 쿠’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는지 모르겠다. (웃음)
아무튼 그 친구들이랑 평택 전국밴드대회에 나가서 광탈도 해보고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안산 청소년 록 페스티벌에도 참가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부터 음악을 한 건데, 부모님께서 반대는 안 하셨나?
요셉_ 사실 반대가 심했다. 그런데 부모님께서 마음을 바꾸신 계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자다가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더니 귀에서 피가 심하게 난 적이 있다.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지르는데 처음 든 생각이 ‘아, 나 이러다 음악을 못하면 어떡하지?’ 이었다. 내 비명소리에 부모님이 깨셔서 같이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귓속에 집게를 넣더니 손가락만한 지네 한 마리를 꺼내더라. 이미 내 피에 쩔어 죽어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음악을 못할까 걱정했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때 이후로 내가 음악 하는 것에 대해 조금 마음을 여신 것 같다. 사실 나도 내가 음악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몰랐다.
이후에는 일반 대학에만 진학하면 뭐든 간섭하지 않겠다고 하셔서 일반 대학에 진학하고 음악을 계속했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음악을 병행하기 힘들지 않았나?
요셉_  어느 대학을 가는 것은 나한테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공부는 좀 하는 편이어서 그냥 형이 있는 한동대에 진학했다. 형이 NEO라는 작사작곡 동아리를 추천해줬는데 그 동아리에서 공연도 많이 하고 노래도 많이 늘었다. 많이 배운 시간이다.
NEO에 들어가게 된 재밌는 비하인드가 있다. 지원 곡으로 임창정의 후유증을 불렀는데 하필이면 코감기가 심하게 걸려있었다. 그래서 훌쩍훌쩍하면서 불렀는데 동아리 사람들이 “쟤는 감성이 미친애”라면서 뽑았다. NEO엔 정상인이 없다. 다들 넘사벽이기도 하고 정말 특별한 사람들이 많다. 아예 휴학하고 음악에 매진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나도 아무리 생각해도 음악은 해야겠는데 학교에서 이렇게 하는 음악은 애매한 것 같아서 고민 중이었다. 근데 당시 휴학 중이던 동아리 윗기수 (백) 은수 형이 “너처럼 노래하는 놈은 못 봤다”며 난 꼭 음악을 해서 슈스케에 나가야 한다고 해서 그냥 바로 휴학신청을 했던 것 같다.
 
부모님은 아셨나?
요셉_ 부모님께는 학기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말씀드렸다. 아니, 사실 통보한 셈이다. (웃음) 아버지가 바로 갓길에 차를 세우셨다. 근데 결국 부모님께서 하셨던 약속이 있으니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허락해주셨다.
 
서울에는 어떻게 올라오게 되었나?
요샙_ 휴학하고 집에 있는데 예전에 밴드 하던 친구가 “우리 서울 가서 제대로 밴드해보자 연락이 왔다. 친구 한 명이랑 같이 고시원에 방을 얻어서 서울에 올라왔다. 처음 밴드를 하던 친구들 넷 중에 셋이 모여서 밴드명을 ‘나린’으로 바꿔 활동했다.
 ‘하늘에서 뭐가 내렸다’는 순우리말인데 이것도 왜 그렇게 지었는지 모르겠다. (웃음)
겨울 때쯤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는데 그 공연을 마지막으로 다들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부족하지만, 이미 NEO활동을 하면서 음악을 많이 알아버렸고 이 친구들은 이제 시작하는 친구들이라 내가 다 이끌고 가기 벅찼던 것 같다.
 
혼자 서울에 남았나?
요셉_ 친구들이랑 헤어지고 서울에 남아서 음악을 하는데, 방세는 내야 하니까 아르바이트를 했다. 별거 다 했다. 음식점, 편의점, 설문지, 주차장, 행사장 스텝…. 돈 되는 건 다했다. 아르바이트하고 오픈 마이크하고 사람들 만나고 하면서 삼 개월쯤 지내니 지치더라. 어느 날 편의점 야간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저녁에 보니까 통장에 90만 원이 들어와 있었다. 얼마 안 했는데 돈이 그렇게 모이는 거 보고 ‘아, 그냥 이렇게 아르바이트하다가 편의점 물려받고….’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몇 초 뒤에 ‘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싶으면서 아르바이트를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슈스케 7에 지원했다. 결과는 광탈이었다.
 
진짜? 왜 탈락했나?
요셉_ 뭐…. 내가 부족하니까 탈락한 거다. 사실 나도 될 줄 알았다. 다른 사람들은 한 곡 부르고 나가는데 나는 20분 넘게 인터뷰하면서 6곡을 불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애매해서 많이 시켰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때 한참 좌절해서 살고 있는데 선배가 예전에 말한 서울 신림동에 있는 ‘작은따옴표’(이하 작따)라는 복합문화예술 공간이 떠올랐다. 페이스북에 검색해보니 마침 함께 일할 팀원을 찾고 있어서 문화기획을 맡으면서 그 공간에서 살게 되었다.
 
작따에서 어떤 문화기획을 맡은 건가?
요셉_ 어린 나이였지만 오픈 드림 무대라는 작따의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다. 어린 팀장이라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그 일을 하면서 수많은 아티스트를 만났다.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되고 나도 행사를 많이 다니다 보니 입소문이 나서 이제는 기획 공연도 하고 불러주는 사람도 생겼다.
 
지금도 작따에 살고 있나?
요셉_ 작따는 작년 12월 초에 나왔다. 음악적으로 더 성숙해지고 싶었다. 사실 작따를 나와 집으로 내려왔을 때 잊히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의외로 많이 불러주더라. 아직은 노래로 돈을 벌고, 부모님께 손 안 벌리고 살 정도는 아니지만, 앨범 수당을 채울 수 있을 정도 여유로워졌다.
 
사진/바람아시아
 
음악 하면서 힘들었던 적은 없나?
요셉_ 그냥 혼자라는 게 힘들었다. 내가 발버둥 쳐야 겨우 누굴 만나고 공연할 기회를 얻는데….밴드로 먼저 시작했던 나로서는 어디를 가나 혼자인 게 외로웠다. 공동체를 찾고 싶기는 하다. 중요한 이야기인데, 이번 앨범을 내고 군대를 다녀와서는 마음 맞는 사람들과 다양한 시도를 하는 밴드를 하고 싶다.
인디음악을 하고 있는 건데, 주류 음악이 아니어서 불안했던 적은 없나?
요셉_ 인디, 주류 이렇게 나눌 수 없는 게, 인디 음악이 주류 음악이 되지도 않는가? 우리가 음악 자체를 보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가수를 보도 듣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인디음악이 주류 음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무(위의 곡)’도 그렇지만, 자작곡들 가사가 참 좋다. 가사는 어떻게 쓰나? 본인 말투인가?
요셉_ 전혀 아니다. 좀 신기한데, 사람들이 ‘삘 탄다’고 하지 않나? 삘을 타면 그냥 막 나온다. 삘 타면 그날 녹음해놓고 잔다. 다음날 들어보면 ‘이걸 내가 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좋은 곡이 있다. 물론 아닌 곡도 있지만. 나는 뭐 신앙적으로 영적인 사람은 아닌데, 좋은 곡이 나올 때에는 진짜 내가 한 게 아닌 것 같다. 내가 의도한 건 아니다. 살면서 모든 게 그렇듯이.
 
노래의 특징은 뭔가?
요셉_ 다 뒤에 터지는 거? 크레셴도 빡! (웃음)
사람들이 내가 노래하면 가사에 집중하게 된다고 말하더라. 가사를 쓸 때처럼 그럴 때에는 정말 내가 한 게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노래할 때 감정 전달에 더 집중한다.
솔직히 노래를 만들 때 남들에게 공감이 될 수 있는 노래를 만들려는 의도로 만들지는 않는다. 음악이 나한테 매력 있는 이유는 노래할 때만큼은 눈치를 안 보고 내 속내를 표현할 수 있어서다. 개인적으로 속에 있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편인데, 노래는 감정을 담을수록 사람들이 더 좋아한다. 좋아하는 사람을 향한 감정, 아버지를 향한 감정…. 감정을 담아서 노래할 때 (듣는) 사람들의 눈빛은 보는 게 참 좋다. 기억에 남기도 하고 중독되기도 한다.
 
음악 하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
요셉_ 있다. 장범준을 만난 적이 있다. 슈스케에 지원하기 전에 대치동에 장범준 씨가 하는 카페에 간 적이 있다. 어느 날 그냥 호기심에 무작정 찾아가서 기웃거리는데 장범준 씨가 나와서 들어오라고 하더라. 원래 그런 사람인 것 같다. 카페 안에 공연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장범준 씨가 내 기타를 보자마자 “어? 기타네? 음악 해요? 노래 한번 해봐요!” 하더라.
 그날 같이 이야기도 하고 합주도 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이 내 노래에 같이 합주를 해주니 신기했다. 원래 그 카페 방침이 데모 CD 10장을 가져가면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도록 무대를 쓸 수 있다. 나도 얼마 전에 데모 CD를 완성했다. 곧 다시 장범준 씨를 만나러 갈 거다.
 
멘토인 가수가 있나?
요셉_ 내가 만족할 줄을 몰라서 이 사람의 이런 면이 닮고 싶고 저 사람의 저런 면이 닮고…. 하다.
제일 닮고 싶은 가수는 김동률이다. 김동률은 노래를 정말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만든다. 노래 자체도 좋고 가사도 예쁘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스트링 편곡을 그만큼 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윤종신처럼 나이 들고 싶다. 지금까지도 ‘월간 윤종신’을 내고 끊임없이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사람인 것 같다. 방송에 비치기에 가정에도 충실한 것 같고. 작사작곡은 말할 것도 없다.
인디계열에서는... 홍이삭도 닮고 싶다. 이삭이 형은 인디계열에서 내가 본 사람 중에 탑니다. 실력도 엄청나도 관객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아…. 은수 형도! 은수 형은 실제로 내 멘토였다.
 
꿈은 뭔가?
요셉_ 난 음악이 좋긴 하지만, 꿈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행복은 뭔가?
요셉_  지금 나? 나는 지금 정말 행복하다. 내 행복은 이렇게 음악을 계속하는 거랑 미래에 좋은 가정을 만드는 것이다. (돈이 없어도) 음악만 하면 이렇게 행복하지만, 좋은 가정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렇게 음악을 하면서 좋은 가정을 꾸릴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아 오순도순 사는 게 내 꿈이다.
 
음악만으로 돈을 버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생각해봤나?
요셉_ 행복한 가정과 음악 둘 중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지만, 만약 선택을 꼭 해야 하는 절박한 순간이 온다면….
아니, 그런 순간을 위해 지금 준비하는 거다. 지금 만족하지 않고 계속 더 나아가려는 게 그 두 가지 꿈을 다 잡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럼 아직 미래에 음악을 제치고 돈을 먼저 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없는 건가?
요셉_ 당연하다. 그럼 내가 행복하지 않으니까.
 
인터뷰를 하면서 용감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요셉_ 신기하다. 근데 계속 이야기하지만 난 절대 용감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소심하고 게으른 사람이다. 말만 들으면 용감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내 삶은 그렇지 않다. 별거 없다. 미래가 걱정은 되지만 음악을 하는 게 재밌고 그냥 좋다. 이 삶을 내가 동경하기도 하고 멋있어 보여서 하는 거다.
하면 행복하니까. 내가 이걸 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을 테니까.
 
인터뷰를 마치며 이 요셉은 사람들이 너무 이것저것 의미부여를 많이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굳이 애써 의미부여를 하지 않아도 자신만의 길을 갈 줄 아는 인디들. 또 자신이 행복한 길을 가는 거라는 용감한 인디, 이요셉. 준비해간 질문이 30개가 넘었지만, 질문을 다 할 필요도 없었다. 음악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요셉의 삶, 행복, 목적, 모든 게 드러났으니까.
 
자신의 행복을 정확히 알고, 지킬 줄 아는 이 요셉은 22살, 음악 하는 ‘인디’이다.
 
 
 
이윤 baram.asia  T  F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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