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6월이다. 대학 1학년생에게 6월은 신입생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서서히 현실을 깨닫는 시기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기말고사라도 잘 봐야 승산이 있다며 단과대 건물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더워진 날씨에 손부채질 하며 지하 입구로 들어왔을 때, 예상치 못한 낯선 분위기를 느꼈다. 흑백영정과 피워져있는 향, 검은 천과 한 장의 사진. ‘한열이를 살려내라!’눈앞엔 또 다른 이의 6월이 놓여있었다.
1987년 6월9일, 이한열 열사가 전경의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사진/바람아시아
이한열. 기억을 끄집어본다. 역사책 어딘가에서 한 줄 봤던 것 같기도 하고, 시험범위에 들어가진 않지만 국사 선생님이 옛 이야기마냥 말씀해 주셨던 것 같기도 하다. 군사정권 시절, 난세 속에 태어난 의인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무표정에 정자세로 찍힌 영정사진은 내가 알던 다른 의인들과 다름 없어보였다. 무심한 듯 날카로운 표정. 다른 점이 있다면 영정사진 옆 사진, 최루탄을 맞고 죽어가는 이한열의 축 늘어진 몸이었다.
이한열의 6월은 어땠을까. 80년 광주 민주화 항쟁 때 무서워 집 안에 숨어있었다는 아이는 7년 후 대학생이 되어 세상 밖으로 뛰쳐나왔다. ‘탁 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국가의 고문 살인 조작에 분개하고, 군사 정권의 호헌 조치 철폐를 외쳤다. 사경을 해매면서도 6.10 항쟁에 참여하지 못할 것을 아쉬워했던 이한열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2016년의 6월 9일, 한열동산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한열이 죽고 1년 뒤인 1988년, 학생들이 마련한 장소에 여전히 남아있다. 한열동산에선 그가 생활했던 학생회관 3층, 중앙도서관 그리고 그가 최루탄을 맞았던 정문까지 모두 보인다. 높은 곳에 있어서인지, 학교 한가운데 있지만 자교 학생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는 익숙하지 않지만 한열동산은 항상 위에서 바라보고 있다. 피로 얼룩진 땅, 제물이 되어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싶다는 그의 안타까운 소망이 이루어진지도 모르겠다.
지난 7일 제12회 박종철인권상 수상자로 백남기 농민이 선정됐다. 백남기 농민은 작년 11월 민중총궐기 시위 도중 경찰의 물대포 조준발사에 머리를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다. 한열과 같은 6월을 보냈던 노장이 나이 일흔에 자신에게 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 상상하지 못했을 테다. 박종철이 죽고, 이한열이 죽고, 많은 이들이 죽어갔지만 국가의 무자비한 폭력은 아직도 반복되고 있다. 이한열이 죽은 지 29년. 여전히 피로 얼룩진 땅, 아직 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아이가 익사했다.
다음은 네 차례. 네 차례
우리마냥 포기당할 것인가.
우린 인간임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
더 이상 맹수가 설치는 원시림으로 방기하지 말자.
우린, 우리가 인간이기에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자.
이한열 作 <박종철> 中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