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읽은 역사책들은 대부분 위대한 영웅들의 무용담을 다뤘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거나 국익에 이바지한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 그러니까 두려움이나 슬픔은 알지 못하는 대범한 영웅들의 역사 말이다. 위대한 역사는 주로 어떤 영웅이 어떤 기술로 다른 사람들을 죽였는지, 어떻게 승리를 거뒀는지, 어떻게 패배했는지, 어떤 장군이 활약했는지 따위를 이야기한다.
위대한 승리의 역사를 말하는 역사책엔 역사 속에 살고 있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빠져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 주저앉아 두려움에 떠는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들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로 201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저널리스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거대한 역사는 으레 지나쳐버리거나 하찮게 여기는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를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소비에트 소녀병 200여명을 인터뷰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작고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한 작가의 열망에서 비롯된 책이다. 1983년 책의 집필이 끝났지만 2년 동안 출판될 수 없었다. 그는 영웅적인 소비에트 여성들에게 찬사를 돌리지 않고 그들의 아픔과 고뇌에 주목한다는 사실 때문에 비난받았다. 당시 출판 검열관은 그가 “위대한 소비에트 여성들을 하찮은 암캐로 만들었다”며 분노했고, “우리에게 필요한 건 위대한 승리의 이야기, 그리고 마르크스와 레닌의 위대한 사상”이라고 소리쳤다.
알렉시예비치는 “사상은 아픔을 모른다”고 맞선다. 위대한 역사만을 기록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겪은 일상적인 감정과 언어, 고통은 하찮은 것이 된다. “죽은 채로 들판에 누워있는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 그저 불쌍했다”는 소비에트 소녀병의 이야기는 역사책에 실릴 수 없다. 적군과 아군 모두 추악한 전쟁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는 사실은 옛 소련 출판 당국의 선택으로 지워졌다. 위대한 승리의 이야기와 사상에 흠결을 낼 법한 역사 속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역사책에서 사라졌다. 국가의 위상을 위해 선택된 역사는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사진/바람아시아
또 하나의 평범한 역사가 지워질 예정이다. 1941년 일제의 비행장 건설을 위해 강제 징용된 한인과 그 후손이 모여 사는 일본 우토로 마을이 이달 말 철거된다. 2019년까지 우토로 마을 주민들이 모두 이주할 공적 주택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예정이며, 2018년엔 우토로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으로 예측된다고 한다. 일본이 얼마 전 강제 징용의 상징인 하시마 탄광을 근대화의 상징으로 미화하는 홍보자료를 배포했다는 사실은, 강제 징용의 상징인 우토로와 그곳 주민들을 역사에서 지우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출판 당국의 검열로 출판될 수 없었던 알렉시예비치의 책은 결국 출판돼 201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한국 홍보 전문가인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이달 초 우토로 마을을 방문해 누리꾼들이 모은 역사기념관 건립기금을 전달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를 기억하려는 노력과 그 결실에서 희망을 본다. 근대화라는 위대한 시간 속에 살던 수많은 평범하고 나약한 사람들이 증언하는 날 것 그대로의 잔악한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이들의 증언이 빠진 역사는 아름다운 신화에 불과하다.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