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기자] 브렉시트에 이어 사드 배치와 일본 자민당의 참의원 선거 압승까지, 예기치 못한 대외적 악재 속에 국내 산업계의 시름도 깊어졌다. 브렉시트로 유럽이 혼돈에 빠지면서 글로벌 경기 회복은 불투명하게 됐다. 특히 사드 배치는 중국의 무역보복과 함께 동북아 정세를 냉전시대로 회귀시킬 수 있는 초대형 이슈다. 여기에다 자민당이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함으로써 엔저로 대표되는 아베노믹스도 한층 더 탄력을 받게 됐다. 악화된 수출전선에 또 다시 균열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기업들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
10일 일본에서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이 압승했다. 연립여당을 비롯한 개헌세력이 대승을 거두면서 평화헌법도 뜯어고칠 수 있게 됐다. 동시에 아베노믹스의 강화도 불가피해 보인다. 엔저로 인한 가격경쟁력의 약화를 경험한 국내 기업들로서는 이번 선거결과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자민당은 이번 선거에서 대규모 금융완화, 과감한 재정투입, 성장전략 등으로 대표되는 아베노믹스의 지속추진을 핵심공약으로 내세웠다. 소비세율 인상 연기와 함께 과감한 재정 투입으로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아베 총리의 의지는 일본 기업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다. 또 엔저의 지속은 브렉시트 충격으로 달러와 엔화로 몰린 글로벌 유동성의 편중흐름을 일정부분 상쇄시킬 수 있는 통화정책 카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오른쪽)가 10일(현지시간) 도쿄 자민당 당사에서 참의원 선거 당선자 이름 옆에 꽃을 붙이고 있다. 사진 : AP/뉴시스
사실 아베노믹스 이후 일본과의 경합도 측면에서 자동차를 제외한 국내 기업들의 세계시장 점유율에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엔화 약세 등으로 국내 기업의 대일 수출이 급감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일본 기업은 개선된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축적된 수익 증대분을 연구개발 또는 사업 재편에 투입하는 등 미래를 위한 준비에 매진해왔다. 이는 소니로 대표되는 전자왕국의 부활과 조선, 철강 등 전통적 산업군에서의 강호 면모를 되찾을 수 있는 기반이다.
사공목 산업연구원 국제산업협력실 연구원은 “참의원 선거 결과로 아베 정권이 공고화되고 양적완화 정책 기조가 지속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며 “최근 엔화가치가 올라가면서 국내 기업들이 부담을 덜었지만, 그동안 일본 기업들이 많은 이익을 남겨 신규 설비에 투자하는 등 제조 경쟁력을 강화한 부분을 고려하면 정부와 기업의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기회도 엿보인다. 코트라는 아베노믹스에도 불구하고 브렉시트, 미국의 금리인상 지연 등으로 당분간 엔고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또 자민당의 선전에 따라 일본의 건설기자재, 전력기자재, IT 시장 진출 기회도 열린다. 자민당은 ‘국토강인화 정책’에 따른 인프라 확충을 위해 향후 5년간 30조엔의 예산을 투입할 예정이다. 재생에너지 사용률 확대 및 에너지 절약대책도 시행해 전력기자재 시장도 커진다. IT기반 구축을 강화하면서 IoT(사물인터넷), 빅데이터, 인공지능, 핀테크 등 국내 IT 기업의 일본 진출 가능성도 높아졌다.
고상훈 코트라 아대양주 팀장은 “이번 일본 참의원 선거로 아베 총리는 아베노믹스 추진에 동력을 얻었다”며 “국내 기업은 아베노믹스 지속에 따른 산업 활성화와, 아베노믹스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 엔화 강세 등 대내외 요인을 모두 주시하고 일본 진출의 기회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경제보복 조치 가능성이 제기되는 사드 변수도 국내 기업들의 불안감을 키우는 주요 요인이다. 특히 지난해 대중국 수출은 국내 전체 수출의 26%를 차지할 정도로 무역의존도가 높은 상황이라, 사드 후폭풍에 대한 긴장감은 남다르다. 지난 2000년 마늘사태 때 휴대폰 수출길이 막히는 악몽도 경험한 바 있어 위기감이 높다.
직접적인 경제제재와 더불어 특정 품목에 대한 덤핑 관세나 환경 및 인허가 규제, 정부 투자나 입찰에서 국내 기업에 보이지 않는 제재를 가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중국 내 반한 감정으로 화장품이나 관광 등 서비스산업에 역풍이 불 수 있다. 중국의 초강세 발언에 이어 러시아도 사드 배치에 대한 군사적 대응 방안을 언급하는 등 한·미·일, 북·중·러가 대립하는 '신냉전 구도'가 형성돼 동북아의 무역지도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사드 배치가 결정되자 스리랑카를 방문 중인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9일(현지시간) 한국을 상대로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피하라"고 경고했다. 사진/뉴스1
브렉시트로 인한 유럽의 정세 불안, 중국과 미국의 신보호주의 정책, 글로벌 분업 약화 등 국내 산업계에 부정적인 요인들은 이미 하반기에 산재해 있다. 11일 대한상공회의소가 10여개 업종별 협·단체와 공동으로 '하반기 산업기상도' 조사를 실시한 결과, 건설과 정유·유화를 제외한 전 업종이 암울하게 전망됐다. 여기에 한·중 간의 무역마찰과 아베노믹스 우려까지 더해지면서 기업들의 고충은 한층 깊어졌다. 특히 조선업의 경우 계속되는 수주 가뭄과 글로벌 경기의 불확실성 증대로 생존 자체가 염려되는 극한 상황까지 내몰렸다.
재계는 일단 사드 배치나 일본 참의원 선거와 관련해 언급 자체를 자제하는 분위기다. 정치·안보와 관련된 사안인 데다, 괜히 자극시킬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사드 배치와 관련해 "비관세 장벽이나 반한 감정이 확산돼 불매운동이 일어날 조짐 등 시장 반응을 주시하고 있지만, 민간기업이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정부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해 무역 마찰 없이 원만히 해결되길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이종명 대한상공회의소 경제정책팀장은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보호무역이 강화되는 추세이고 중국도 수입규제가 점점 늘어나던 상황이라 이번 사안이 중첩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에 대해서 면밀히 지켜보고 있다"며 "무역 피해가 최소화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대책은 물론, 기업들도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