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성휘기자] 조명이 켜지고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춤을 춘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그 움직임에 관객들은 매료돼 환호한다. 배우들 역시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에 더욱 아름다운 춤사위로 보답한다. 그렇지만 무대 아래 현실은 무대만큼 낭만적이지 않다.
높은 지명도를 가진 일부 소위 ‘네임드’ 배우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배우들은 수입이 불규칙해 일상생활을 꾸려가기도 버겁다. 몸이 무기이고 악기인 댄서들의 경우 직업수명이 40세를 넘어가기 어렵다. 무대에 대한 열정만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넌버벌 퍼포먼스(non-verbal performance) ‘사랑하면 춤을 춰라’(사춤)의 제작사 두비컴뮤니케이션(두비컴)은 이러한 현실을 타파하고자 노력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업계에선 드물게 배우와 스텝들과 러닝개런티 대신 급여제로 계약해 생활에 안정감을 주고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도록 돕고 있다.
두비컴을 이끌어가는 것이 각종 무대 연출에 잔뼈가 굵은 최광일 대표다. 최 대표는 글로벌 경쟁력을 갖게 된 한국 영화와 가요처럼, 무대 공연도 새로운 한류 콘텐츠이자 관광 콘텐츠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최 대표를 지난달 30일 종로구 인사동 사무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1963년 서울 출생인 최광일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무대 연출에 홀딱 빠졌다. 다른 이들이 연기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면서 그들이 뛰노는 무대를 만드는 일에 희열을 느꼈다. 용문고등학교 연극부로 시작해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하고 극단 전원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평생을 오롯이 무대 연출에 바쳤다.
최광일 두비컴뮤니케이션 대표가 종로구 인사동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지금도 그렇지만 최 대표가 젊은 시절에도 연극쟁이는 먹고살기 어려웠다. 30대가 된 최 대표는 먹고 살길을 찾다가 대형 콘서트와 같은 이벤트 연출에 눈을 떴다. 1994년 이벤트 연출회사 ‘두비컴’을 설립한다.
두비컴은 9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들인 HOT, 김건모, 015B, NEXT, 전람회, 솔리드 등의 대형 콘서트들을 도맡아 연출하면서 업계에 이름을 날렸다. 최 대표도 1993년 대전엑스포를 시작으로 최근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전주국제영화제, 여수세계박람회, 한국공연관광축제 등 굵직굵직한 이벤트들의 전야제나 개·폐막식 연출 등을 감독하면서 지금도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잘나가던 두비컴은 2000년대에 들어 창작콘텐츠 제작에 나선다. 최 대표는 “2000년대 초반 음반시장이 음원시장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극심한 혼란이 있었다”면서 “당시 콘서트의 상업화가 심해지고 연출자의 만드는 재미가 사라지면서, ‘내가 한번 공연 콘텐츠를 만들어보자’라는 생각에 도전했다”고 회고했다.
2003년 10억원이 넘는 제작비를 들여 댄스뮤지컬 ‘댄서 에디슨’을 만들었다. 멋지고 화려했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관객과의 소통이 부족했던 것이 이유였다.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댄서 에디슨은 2004년 지금의 ‘사랑하면 춤을 춰라’(사춤)로 재탄생한다.
넌버벌 퍼포먼스 ‘사랑하면 춤을 춰라’의 배우들이 공연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두비컴
“관광에 공연은 중요 콘텐츠”, “사드 문제로 중국 비즈니스 중단 우려”
사춤은 만국공통 언어인 춤을 매개로한 대사가 없는 넌버벌(non-verbal) 공연이다. 남녀 주인공 세 명이 성장하면서 겪는 각종 에피소드를 힙합, 재즈댄스, 현대무용, 브레이크 댄스 등을 통해 표현했다. 10여년을 넘게 공연하면서 시대별로 유행하는 춤을 가미하고 의상도 바뀌었지만, 관객과의 소통이라는 핵심은 유지했다.
사춤의 가장 큰 강점은 언어의 장벽을 넘은 넌버벌 공연이라 외국인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전체 관객의 50% 정도가 외국인이다. 종로 시네코아 사춤 상설공연장을 향한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걸음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고, 사춤 공연팀은 미국, 중국, 일본, 영국, 러시아 등 전 세계 60여개 도시를 찾아 공연했다. 약 4000여회 공연에서 내·외국인 관객 200만명 이상을 만났다.
최 대표는 “한국의 관광 콘텐츠를 보면 쇼핑이나 관광지 투어는 있지만, 야간관광 쪽은 비어있다. 그 부분을 책임진 것이 바로 사춤과 같은 넌버벌 공연들”이라며 “2014년 기준 외래 관광객이 국내 1400만명 들어왔는데 그중 190만명이 공연을 찾았다. 전체의 10%를 넘는 규모로, 공연을 보기 위해 다시 방한하겠다는 관광객들도 늘어나는 추세다”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최근 몇 년간 공연관광업계는 말 그대로 고난의 행군을 이어갔다. 독도문제로 한·일간 외교 마찰이 컸던 2012년을 전후해 일본인 자유개인여행객(FIT)보다 중국인 패키지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업계는 큰 혼란을 겪게 된다.
최 대표는 “자유여행을 즐기는 일본인들은 공연도 개별적으로 와 할인율이 크지 않지만, 중국인들은 단체 저가패키지가 주종이라 여행사들이 공연사에 할인율을 높게 요구한다”며 “울며 겨자먹기로 몇몇 공연사들이 요구를 받아들이는게 현실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공연의 질은 떨어지고 운영에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고 토로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2013년 11월 한국공연관광협회가 결성된다. 사춤을 비롯해 난타, 점프, 비밥, 판타스틱, 드럼캣, 페인터즈 히어로, 빵쇼 등 자체 상설공연장을 가지고 2년 이상 공연을 이어온 검증된 업체들이 힘을 모았다. 초대 협회장에는 최 대표가 선임됐다.
그러나 상황은 아직도 악화일로다. 공연 콘텐츠의 힘이 외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2015년 메르스 사태로 내·외국인 관객들의 발길이 줄어들어 각 공연사들의 배우와 스태프가 서로 객석 품앗이를 하기도 했다. 올해는 더욱 심각하다.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한반도 배치 문제로 그나마 있었던 중국인 관광객도 끊어질 상황이다.
지난해 사춤은 중국 상해에서 2주간 공연을 했고, 24개 도시 투어를 도는 등 중국 현지에서 새로운 한류 콘텐츠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올해 9월도 북경에서 2주간 공연을 하기로 지난 6월 달에 계약이 거의 마무리됐지만, 돌연 중국 당국의 공연심의가 계속 보류되면서 홍보도 제대로 못한 채 사실상 백지화 됐다.
최 대표는 “일반인들은 아직 체감을 잘 못할지 모르겠지만 포상휴가와 같은 단체 인센티브 관광은 확연하게 줄었다”며 “중국 현지 여행사들이 한국행 패키지 상품을 죄다 내려버려 전세기도 엄청 줄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어떤 획기적 전환점이 없다면 중국인 일반 관광객이 줄어드는 것은 피할 수 없다”며 “9월말 중추절 관광객부터 눈에 띄게 줄어 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영국 에드버러 페스티벌에서 ‘사랑하면 춤을 춰라’를 본 현지인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두비컴
“공연업계는 사회적 기업에 적합, 청년실업 해소하고 문화서비스 제공해”
두비컴은 지난 2010년 일자리 창출과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혼합형 사회적 기업으로 고용노동부 인증을 받았다.
최 대표는 “공연사 만큼 사회적 기업과 어울리는 곳이 없다”며 “춤을 좋아하는 청년들에게는 일자리를 만들어 청년실업을 해소하고, 사회 취약계층에게는 객석기부를 통해 문화를 향유할 수 있게 돕는다”고 설명했다.
두비컴은 지난 2003년부터 급여제를 실시한 업계의 몇 안되는 회사다. 보통 공연마다 배우와 스텝들을 별도 고용해 회수별로 수당을 지불하는 러닝개런티가 아직도 업계에서 일반적이지만, 상설 공연을 하고 있는 사춤은 직원들을 장기적·안정적으로 고용하고 있다.
그 덕에 배우들의 직종전환도 용이하다. 30대를 넘어가면서 많은 배우들이 은퇴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두비컴 소속 배우들은 마케팅과 무대연출 등을 옆에서 지켜볼 기회가 많아 스텝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많다.
두비컴이 2010년 사회적 기업으로 등록한 것은 인건비 지원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 지원은 3년 만에 끝났다. 지금은 혜택은 크게 없고 사회봉사라는 의무만 남아있다. 두비컴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객석나눔 행사를 진행해 사회소외 계층을 초대하며 의무를 다하고 있다.
최 대표는 “제조업의 경우 그나마 공공기관 용역 입찰에 일정 혜택이 있는 것 같지만, 문화 공연 쪽은 그런 것도 별로 없다”며 “양질의 공연 콘텐츠는 외국인 관광객 유인효과가 있고, 청년 일자리도 창출한다. 정부가 이런 부분을 감안해 적극 지원해줬으면 한다”고 희망했다.
최 대표가 두비컴을 설립하고 어느덧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업체들이 쉽게 등장하고 사라지는 공연업계에서 20여년을 넘게 버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최 대표는 “나는 무대 연출만 하는 사람이라 맞는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경영도 결국 사람인 것 같다”며 “기술적인 측면은 스텝에게, 재무관리는 전문가에게 맡기면 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잘 풀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본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이성휘 기자 noirciel@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