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효정기자] 경기도 시흥시 시화공단에 위치한 컴베이스 작업장. 지난 2월 개성공단 폐쇄 이후 임시적으로 마련됐다. 입구부터 모든 전등이 꺼져 있었다. 직원들이 작업 중인 선반 위에만 등을 밝히고 있었다. 개성공단이 폐쇄된 지 10개월. 하루아침에 공장을 잃은 '컴베이스'는 작업장 하나 운영하기에도 벅찼다. 박남서 컴베이스 대표는 "현재 작업은 수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나마 남은 거래선을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끈"이라며 씁쓸해했다.
시화공단 내 위치한 컴베이스 작업장. 직원들이 주문 받은 완구를 조립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지난 1983년 컴퓨터 부품 제조사로 출발한 컴베이스는 2008년 개성공단에 입주했다. 생산품 100%를 수출하던 컴베이스는 개성공단 입주로 가격경쟁력 강화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것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박 대표는 "개성공단은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에 공장을 짓는 것보다 더 의미가 컸다"며 "남과 북의 경제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컴베이스는 2010년 천안함, 연평도 사태 등으로 해외거래선이 끊기자 완구 생산으로 업종을 변경해 내수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위기는 기회였다. 사출, 도포, 조립 등 일괄생산을 갖춘 유일한 회사로 발돋움한 컴베이스는 국내 완구시장의 성장세에 힘입어 경쟁력도 높아졌다. 손오공, 영실업 등 국내 완구 대표업체들과 손 잡고 제품을 생산했다. 그는 "완구 제품은 트렌드가 빠르게 변하는 업종 중 하나이기에 의견 조율을 위해 주문자와 생산자 간 거리가 가까울수록 유리하다. 반품이나 AS 대응도 마찬가지"라며 "중국이나 베트남에 공장을 둔 다른 회사들보다 개성에 공장을 둔 우리회사의 경쟁력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컴베이스는 신사업으로의 전환과 함께 평균 연매출 20억원 이상을 거뒀다. 직원도 310여명까지 늘렸다.
하지만 2013년 개성공단이 잠정 중단되면서 두 번째 위기를 맞았다. 박 대표는 "6개월가량 공장이 문을 닫았는데, 무엇보다 거래선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에 힘을 쏟았다"며 "재개에 대한 희망이 컸던 분위기였기에 거래선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2013년 당시를 회상하며 "지금에 비하면 그때는 천당"이라고 말했다. 개성공단 폐쇄 10개월이 지난 현재 10여곳이 넘었던 거래선 가운데 단 한 곳만 간신히 유지되고 있다. 직원도 10여명으로 대폭 줄었다. 경쟁력도 사라졌다. 사출에서 도포, 조립까지 일괄생산을 해왔던 컴베이스는 공장을 잃은 탓에 현재 완구 조립만 가능하다.
컴베이스는 이번 개성공단 폐쇄로 고정자산과 유동자산을 포함해 40억원가량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정부로부터 보상 받은 금액은 17억8000만원에 불과했다. 박 대표는 "절반도 안 되는 금액만 보상 받았다"며 "국내에 공장을 다시 마련해서 운영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한탄했다.
박남서 컴베이스 대표. 사진/뉴스토마토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기업의 자금창구 역할을 하는 은행권의 대출 문턱도 높아졌다. 올 한해 매출로 내년도 은행권 신용평가가 이뤄져 앞길은 막막하다. 박 대표는 "사실상 1월만 공장이 가동된 셈이니 연매출은 잡히지도 않는다"며 "쉴새없이 공장 부지를 알아보고 있지만 자금사정이 여의치 않고, 은행권 대출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에 대한 원망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정부 결정으로 피해를 입었으면 그 피해를 보상해줄 책임과 의무가 있지 않나. 심지어 새로 사업을 시작하는 스타트업에도 정부가 지원을 해주고, 또 경영실패로 어려워진 기업에도 국민 혈세를 투입하고 있다"면서 "개성공단 기업들만 방치하고 있는 것에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120여개의 개성공단 입주기업들 모두 사정은 같다"는 그의 말은 눈물이었다.
박 대표는 그럼에도 희망을 끈을 놓지 않았다. 개성공단이 재개될 것이란 희망도 여전하다. 그는 "하루 빨리 공장을 마련해 거래선들과의 신뢰를 회복하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남북간 신뢰도 회복돼 개성공단의 문이 다시 열려 지난 8년간 일했던 터전을 다시 찾을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임효정 기자 emyo@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