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이면 대한민국 행정사의 또다른 기록이 하나 바뀐다.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인 서울의 최장수 시장이 전임 오세훈 시장에서 박원순 시장으로 재임 1884일만에 새로 이름을 올린다. 물론 ‘행정 달인’이라 불린 고건 전 시장이 2213일 재임하며 단순 기간으로는 가장 길지만, 고 전 시장은 1988~1990년, 1998~2002년 각각 관선과 민선으로 나눠 재임했다. 관선 시절에도 구자춘 시장이 1572일로 가장 길었을 뿐, 제26대 김상철 시장이 자택 그린벨트 훼손 논란으로 7일만에 사임하는 등 각종 사건·사고 등으로 물러난 시장들이 대다수다.
처음으로 서울시란 이름을 갖게 된 1946년부터 2016년까지 박 시장을 포함해 36명이 시장직에 오르며, 평균 재임기간이 2년도 채 못 된다. 조선시대에 서울시장 격인 한성판윤 역시 1395년부터 1910년까지 1133명이 재임해 평균 재임기간이 4개월에 불과하다.
박 시장을 1884일이나 버틸 수 있게 한 힘은 ‘콘텐츠’와 ‘꼼꼼함’이다. 일각에선 이명박 전 시장의 청계천 같은 한 방이 부족하다고 폄하하지만, 박 시장은 서울시 공무원 사회에서 자타공인 ‘에너자이저’로 통할 만큼 왕성한 활동으로 그만의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쇼맨십’, ‘포퓰리즘’이라는 비판과는 달리 박 시장은 대부분의 일정에서 바쁘다는 이유로 얼굴만 비추고 일어나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여느 단체장·정치인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친환경 무상급식과 찾아가는 동주민센터로 복지체계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으며, 국공립어린이집을 731곳 늘렸으며, 노후된 학교 화장실을 바꾸고 서울시립대에 반값등록금을 도입했다.
5년간 13만호가 넘는 임대주택을 공급하면서도 채무를 7조원이나 줄인 부분도 단순히 개발이익 환수라고 평가절하하기엔 무리가 있다. 지하철 9호선과 우면산터널의 재구조화에서는 박 시장의 행정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났으며, 생활임금제 도입,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등 노동과 인권 분야는 박 시장의 전공과목이나 마찬가지다.
이번 촛불정국에서도 박 시장은 ‘광장지기’를 자처하며 경찰 물대포에 소방용수 공급을 막고, 화장실 안내, 대중교통 연장, 쓰레기 수거 등으로 후방지원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히, 사이다같은 톡 쏘는 발언을 보여주기보다는 촛불정국 이후의 새로운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모습은 콘텐츠와 꼼꼼함에 강한 박 시장답다.
박 시장은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당장의 개헌보다 청와대·재벌·검찰의 개혁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1대 99의 불평등을 혁파하기 위해 재벌·중소기업·노동·복지 4개 분야의 정책 대안과 모두를 위한 경제 ‘위코노믹스’라는 비전을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기업분할명령제 도입, 초과이익공유제도 도입, 중소상인 집단교섭권 인정, 공정거래위 권한 조정, 노동조합 조직율 30% 달성, 비정규직 축소 및 대우 개선, 공공부문 일자리 100만개 창출, 한국형 기본소득제도 도입 등이다. 이는 헌법을 바꾸지 않고도 실현 가능한 것들로 짧은 시간에 준비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강도 높으며, 몇몇은 논의가 필요할 정도로 신선하다.
박 시장은 지난해 메르스 사태 당시 적극적인 대처로 한 때 대권주자 지지율 1위를 차지했기도 했지만, 구의역 사고 이후 꺾이기 시작한 지지율은 촛볼정국에서도 좀처럼 오르질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박 시장은 당장 지지율에 집착하며 무리한 퍼포먼스 대신, 낮에는 시청 집무실, 밤에는 광화문광장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색깔대로 나아가고 있다. 만약 박 시장이 대선에 출마하려면 서울시장을 사임해야한다. 그가 세운 최장수 시장 기록 역시 멈춰지게 된다. 박 시장의 강점이 이번 대선가도에도 발휘될 수 있을까. 이 한 치 앞도 모를 정국의 끝이 궁금해지는 이유 중 하나다.
박용준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