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기자] 원자재산업 사이클(경기순환)을 붕괴시킨 것은 ‘셰일 혁명’이다. 저유가의 장기화는 셰일오일 등장에서 비롯됐다. 과거에도 여러 요인으로 유가가 폭락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V자형으로 반등했고, 지금처럼 수년간 지속된 경우는 드물었다. 사양 길을 걷던 정유 및 석유화학은 저유가로 되레 수익성이 커져 극적으로 부활했다. 하지만 저유가 효과는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원자재를 중국에 수출해 선진국 시장에 되파는 무역 공조도 약화되고 있다. 철강업은 공급과잉에 허덕이며 보호무역 조치의 집중 견제도 받는다. 결국 답은 체질 강화 및 사업 다각화에 있다.
정유·화학의 이례적인 호황은 초유의 저유가 덕분이다. 저유가는 셰일 혁명에서 비롯됐다. 모래와 진흙이 단단하게 굳은 암석(셰일층)에 존재하는 셰일가스와 셰일오일은 경제성이 낮았다. 채굴기술이 발달되고, 고유가에 가격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시선은 다시 셰일로 모여졌다. 미국은 200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셰일자원 생산이 늘어나 2009년부터는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최대 천연가스 생산국이 됐다. 미국내 셰일오일 생산량은 2009년 하루 25만 배럴에서 2014년 407만 배럴로 5년 동안 16배 이상 늘었다. 미국을 주도로 원유생산이 급증하자 OPEC은 입지가 약화됐다. 2014년 하반기 들어 세계경제 성장 둔화로 석유수요 부진까지 겹치자 OPEC은 공급량을 늘려 시장 사수에 나섰다. 2014년 6월 배럴당 111달러이던 두바이 유가는 그해 9월 100달러 밑으로 내려가 2015년 1월 45달러까지 급락했다. 이후 5월 60달러대로 반등했다가 다시 하락해 2016년 1월22일 25달러의 바닥을 찍었다.
저유가는 수년간 더 지속될 전망이다. 1980년대 2차 오일쇼크를 경험한 비OPEC 국가들이 원유 생산을 늘렸을 때도 OPEC이 점유율 방어에 나서 유가 회복에 15년이 걸린 적도 있다. 전문 연구기관들은 유가가 2030년대에 배럴당 100달러대로 회복할 것이란 관측도 내놨다. 키는 셰일오일이 잡고 있다. 유가가 50~60달러를 상회할 경우 미국의 셰일오일 공급이 급증할 가능성이 있어 국제유가의 상승 속도가 제한된다. 실제 미국의 원유 생산은 지난해 9월까지 감소세를 이어가면서 유가 반등 요인이 됐으나 이후 증가세로 돌아섰다. 이달석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공급 측면에서 탄력적으로 생산을 조절할 수 있는 셰일오일이 시장에 등장함에 따라 유가 상승을 억제하고 저유가를 장기적으로 끌고 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유·화학업계는 유가 급락시 재고평가손실로 타격을 입었지만 저유가 상태가 안정화되면서 수익성이 개선됐다. 재료값이 폭락한 데 비해 제품값은 덜 하강하며 마진이 커졌다. 제품값 하락으로 소비도 늘었다. 지난해 세계 석유 수요는 전년 대비 150만b/d(일일 사용량) 증가한 9557만b/d를 기록했다. 중국의 자급률 상승과 경쟁 심화, 대체연료의 급성장 등으로 위기를 맞았던 화석연료 기반 업종이 셰일 혁명이란 반전으로 뜻밖의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저유가가 유지되더라도 제품가격에 따른 소비 진작 효과는 무뎌질 수밖에 없다. 유가는 지난해 최저점을 지나 점진적으로 반등했다. 저유가 효과도 이미 정점을 지났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최대 수출시장인 중국의 자급률 상승이 진행형인 것도 위협이다. 중국은 자체 정유설비를 늘려 이미 석유 수출국으로 전환했다. 폴리염화비닐(PVC), 고순도테레프탈산(PTA), 폴리스티렌(PS), 합성고무(BR, SBR) 등 일부 화학제품은 중국 자급률 상승으로 공급과잉이 된 지 오래다.
국제무역 공조가 약화되면서 한국이 원자재를 중국에 수출하고 중국이 이를 가공한 제품을 선진시장에 되파는 구조도 흔들린다. 미국의 트럼프발 보호무역 강화 기조가 여기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미중 간 무역 마찰로 중국의 수출이 위축될 경우 중국에 45%를 수출하는 국내 석유화학 업계도 타격을 받게 된다. 미국은 또 셰일가스 개발로 2020년까지 ECC(에탄 분해 에틸렌 생산설비)를 2014년 대비 50% 증설할 계획이다. 미국과 중동을 중심으로 에탄(가스) 기반 설비의 대규모 증설이 이뤄져, 국제유가가 상승할 경우 나프타(석유) 기반 국내 NCC(나프타 분해 에틸렌 생산설비)의 가격경쟁력이 크게 떨어질 것이 우려된다. 현재 50달러 선에선 NCC가 경쟁 우위를 보이지만 60달러대 위로는 상황이 뒤바뀔 수 있다. 때문에 석유화학 기업들이 호실적을 거두는 상황에서도 산업 구조조정 얘기가 꾸준히 나온다.
철강도 유가와 밀접하다. 철강업은 저유가로 인해 중동 산유국 건설 경기가 침체되고 해양 플랜트 프로젝트가 무산되는 등 수요가 위축됐다. 세계 철강산업의 성장동력이었던 중국 수요도 정점을 지나 저성장 기조가 고착화됐다. 중국은 2000년대 빠른 경제성장과 함께 급증한 철강 수요를 바탕으로 철강 생산규모를 큰 폭으로 확대했으나, 2010년대 들어 성장 둔화로 철강 수요도 정체돼 심각한 공급과잉 문제에 직면했다. 중국의 잉여 물량은 철강재 수출 급증으로 이어졌고, 이에 따라 미국 등 세계 각국은 자국의 철강산업 보호를 위해 철강재 수입 규제 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세계 철강산업의 연 1%대 저성장이 3년간 더 이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국내 철강업계는 공급과잉 심화와 수입 규제 강화로 세계 시장에서 중국의 저가 철강재와 경쟁이 치열하다. 대내적으로는 조선업을 비롯한 수요 산업이 부진해 수익성이 저하됐다. 포스코는 2009년 외환위기 당시에도 영업이익률이 10.5%로 두 자릿수를 유지했으나, 중국발 공급과잉이 심화되면서 2011년부터 한 자릿수(7.9%)로 내려앉았다. 2012년 5.7%, 2013년 0.9%, 2014년 1.8%, 2015년 2.1%, 2016년 1.9% 등 저조한 이익률을 보인다. 중국 내 환경 규제와 더불어 정부 주도의 철강 생산 감축 등이 진행되고 있으나 한계가 있어, 올해도 1%대 이익률이 예상된다.
유가는 예측이 어렵고 변동성이 크기 때문에 결국 사업 다각화 및 체질 강화만이 최선책이란 결론에 이른다. 현재 호황이라도 다각화 속도를 늦춰선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SK이노베이션은 정유사업을 수행하는 SK에너지가 2013년 870억원의 영업적자를 냈을 때도 석유화학 등 신사업에 힘입어 전체 1조4586억원의 흑자를 거뒀다. 제품 포트폴리오가 다양한 LG화학의 경우 상대적으로 NCC 등 주력제품의 집중도가 높은 롯데케미칼에 비해 비교적 안정된 실적 추이를 보인다. NCC 수익성이 극대화된 지난해 롯데케미칼은 LG화학(1조9919억원)을 제치고 2조5478억원의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거뒀지만 이전 실적이 하락할 때는 낙폭이 훨씬 컸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업황 부진에도 LG화학은 1조원대 영업이익을 기록, 견조함을 유지했지만 롯데케미칼은 3000~4000억원대로 주저앉았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