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네거티브도 올바로 해라

입력 : 2017-04-11 오전 6:00:00
한국 대통령 선거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지난주 각 당 후보경선이 종료됨에 따라 대선판도가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동안 시중을 떠돌던 ‘문재인 대세론’은 사라지고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급부상하면서 문재인-안철수 양강구도 속 치열한 난타전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각 진영에서는 여론을 선점하기 위해 네거티브 공격에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이다. 네거티브 캠페인 연구자들에 의하면 긍정적인 광고보다 부정적 광고가 유권자에게 더 어필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후보들이 벌이는 네거티브 캠페인은 엄밀히 말하면 네거티브라고 볼 수 없는 면이 있다. 안철수 후보가 지난 4일 대전 한밭체육관에서 한 후보 수락연설을 놓고 민주당이 “오바마의 연설을 흉내냈다”고 공격한 것은 네거티브라기보다 치졸한 헐뜯기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정치 심리학에 ‘스키마(Schema) 이론’이 있다. 스키마는 대상과 사건·사람의 전형적인 특징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기억 속에 저장된 일종의 고정관념이다. 예를 들면 유권자들의 뇌리에 케네디나 미테랑, 오바마 등 유명 정치인들의 이미지나 언변, 행동들이 좋은 이미지로 자리하고 있다. 대선 후보들은 이들의 행동을 흉내냄으로써 유권자들의 표심을 흔들고자 한다. 이런 관점에서 안 후보가 오바마를 인용했다면 무엇이 그리 문제가 되겠는가?
 
안 후보는 “이 나라는 진보의 나라도, 보수의 나라도 아닙니다…청년의 나라도, 어르신의 나라도 아닙니다…남자의 나라도, 여자의 나라도 아닙니다. 국민의 나라입니다”라는 말로 분열된 한국을 통합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물론 오바마 연설에서 착상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좀 더 세련되게 자기 것으로 재창작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통합의 메시지를 던지고자 한 노력은 가상하다.
 
여기서 따지고 싶은 또 하나의 문제는 오바마가 미국인에게 보낸 메시지는 과연 오바마 자신의 것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오바마도 마르틴 루터 킹이나 말콤 X, 아니면 역대 미국 대통령의 연설에서 영감을 얻었을지 모른다. 왜 우리는 오바마 신드롬에 빠져 있는 것인가? 오바마만이 창작 능력이 있고 멋진 말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여론 연구의 바이블’로 불리는 책 ‘여론과 군중’(가브리엘 타르드 저)을 보면 알자스-로렌 지방 작가이자 정치인인 모리스 바레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내 생각들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생각들을 얻었다. 그것은 로렌으로부터 온 생각들이다.” 다시 말해 바레스의 생각은 자기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 로렌의 군중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생긴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처럼 누구의 말이나 생각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온다. 따라서 “이 말은 이 사람의 것이다”라고 못 박을 수 없다.
 
프랑스도 대선 때마다 슬로건을 베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르코지가 미테랑을 베꼈고, 올랑드가 시라크를 베꼈다는 등등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한국처럼 큰 파장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2007년 대선에서 우파 대중연합의 후보인 니콜라 사르코지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사용한 명문장을 슬로건으로 베껴 사용했다. 1978년 10월22일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 즉위식 미사에서 신도들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자기 인생을 살라며 “두려워하지 마세요”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이 말은 요한 바오로 2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이 구절을 사르코지는 2007년 3월 파리 19구에 있는 제니스 극장에 모인 청년들을 향해 던졌다. 그는 “프랑스는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노동, 재능, 노력의 가치를 부각시켰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두렵지 않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내 생각들을 믿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가지는 순간 벌써 잃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사르코지가 차용한 ‘두려워하지 마세요’는 선거기간 내내 사용되었다. 이에 라이벌인 사회당은 어떤 반응을 했을까? “사르코지는 요한 바오로 2세 따라쟁이”라며 표절 시비를 걸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프랑스 언론이 사르코지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유명한 글귀를 인용해 ‘공화국의 신뢰 회복’을 새롭게 발전시키고자 한다는 보도를 했을 뿐이다.
 
아무리 선거에서 네거티브 공격이 하나의 전략으로 굳어진 현대정치라지만 네거티브로 보기 어려운 소재마저 들춰 네거티브하지 마라. 2012년 대선에서 이런 조잡한 싸움으로 진짜 검증의 주제들을 다 놓쳐버린 결과 박근혜라는 부끄러운 대통령이 탄생하지 않았던가. 그런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 이번만큼은 제발 상대방의 능력과 정책을 들어 네거티브에 나서라. 그러면 네거티브는 선거전을 흥미진진하게 하는 양념이 될 것이다. 각 당의 선거 캠프는 이점을 명심해 품격 있는 선거전을 펼치기 바란다.
 
최인숙 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프랑스 정치현상을 잣대로 한국의 정치현실 개선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책 ‘빠리정치 서울정치(매경출판)’를 펴냈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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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