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청년은 푸르지 못 하다

입력 : 2017-04-26 오전 6:00:00
[뉴스토마토 김지영 기자]청년이란 말의 역사는 짧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건 1900년대 들어서다. 1920년대엔 청년회 결성이 유행처럼 번졌다. 청년은 새로움이요, 변화의 상징이었다. 푸른 나이를 뜻하는 청년(靑年)은 소년(少年), 중년(中年), 노년(老年) 등 연령을 기준으로 한 기존의 구분과 대비됐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은 푸르지 않다. 절기로 따지면 봄. 이제 막 씨앗을 만들어 어린 열매를 맺을 때지만 현실에선 꽃도 못 피우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청년의 삶은 팍팍하다. 입시에 매달려 10대를 보내면 대입 후엔 취업난이 기다린다. 대기업, 공공기관이 아닌 이상 월급은 대부분 쥐꼬리다. 그 돈으로 생활을 하면서 학자금 대출을 갚고 저축도 해야 한다. 그렇게 몇 년을 일해도 통장 잔고는 쌓이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연애는 미뤄진다. 연애와 결혼, 출산을 모두 포기하는 3포 세대는 이제 흔한 얘기다. 이 지옥에 적응하길 거부하면 ‘노오력’이 부족한 낙오자가 된다. ‘꼰대’로 표현되는 일부 기성세대의 비뚤어진 시각은 변화를 요구하는 청년의 목소리를 투정 정도로 깎아내린다.
 
나무는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성장할 수 없다. 뿌리를 내릴 비옥할 토양이 있어야 하고 적당한 볕과 비, 바람이 필요하다. 새 숲에 옮겨 심어진 아카시아나무처럼 작위적 존재가 주변의 양분을 독식해서도 안 된다. 청년도 마찬가지다.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돼야 한다. 사회에서 첫 발을 떼는 시점에는 사회적·제도적 배려가 필요하다. 그렇게 성장한 청년은 열매를 맺고, 그 열매는 사회 발전과 후세대 청년의 성장을 위한 양분이 된다.
 
순환이 끊긴 사회는 병든다. 일본의 경우 20년간 이어진 장기 경기침체 속에서 청년은 소외됐다. 불안한 고용안전망, ‘청년은 의존적 존재’라는 사회적 편견 속에서 청년들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삶보다 ‘개인’으로서 삶을 택했다. 그 결과 취업을 거부하는 청년이 늘면서 일본 기업들은 구인난에 신음하고 있다. 또 비혼 증가로 출산율 상승세 유지에 비상이 걸렸다. 우리도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다. 대졸 이상 고학력 실업자와 구직단념자가 급증세고, 출산율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사태에 직면하지 않으려면 청년에 대한 배려가 ‘시혜’라는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 이런 관점에선 청년에 대한 투자가 ‘비용’으로, 또는 세대 간 형평성에 어긋나는 ‘특혜’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청년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 제거다. 개개인의 꿈과 개성을 무시한 줄 세우기식 교육, 열정페이로 대표되는 노동력 착취, 비정규직 차별, 중소기업·자영업자에 대한 대기업의 횡포는 청년을 사회 밖으로 내몬다. 성장 사다리가 부재한 상황에서 남은 청년은 소모되고, 이탈한 청년은 사회적 비용으로 전락한다.
 
19대 대통령 선거가 보름도 채 남지 않았다. 새 정부에서는 청년들에게 따뜻한 볕이 내리쬐길, 청년들이 꿈을 꽃피우고 단단한 씨앗을 맺을 수 있길 기대해본다.
 
김지영 정경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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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