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우열을 어찌 가릴 수 있으련만, 그래도 대통령 선거만큼 중요한 선거는 없을 것이다. 누가 최고의 리더가 되느냐에 따라 한 나라의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일부 국가의 경우 그 나라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지형마저 요동치게 하는 원인이 된다. 미국의 최고지도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보면서 이를 뼈저리게 통감한다. 트럼프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 비용을 우리에게 내라 하고, 어느 날은 북한 김정은을 ‘스마트 쿠키(영리한 친구)’라 칭찬한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어안이 벙벙하다. 트럼프를 차치하고 지난 대선에서 선출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어떠했는가.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이러한 측면에서 이번 프랑스 대선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한판 승부였다. 사상 초유의 경기침체와 실업률 증가, 테러 확산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유권자들을 파고들어 정권 탈환을 노리는 극우들이 극성을 부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지난달 23일 대선 1차 투표 후 결선까지 2주간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프랑스 공화국의 가치를 부정하고 유럽연합을 부정하는 FN의 마린 르 펜 후보는 창당 이래 최고 득표율(21.4%)을 얻어 전진의 엠마뉘엘 마크롱 후보와 결선투표를 벌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선 1차 투표에서 마크롱 후보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좌·우파 후보들마저 결선에서 마크롱을 지지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특히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는 양식 있는 프랑스 원로들은 국민 여론을 환기시키는데 앞장섰다. 원로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레비와 정신분석학자 자크-알랭 밀리에는 기권을 막기 위해 파리에서 ‘공화국 포럼’을 열고 15개 도시에 생방송으로 중계했다. 앙리-레비는 “결선투표에서 FN의 르 펜 후보가 40%를 확보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마크롱 후보도 르 펜 후보를 결선에서 이기기 위해 우파 원로 지도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가장 먼저 자크 시라크 대통령 시절 수상을 지냈고 비엔느(Vienne) 지역의 상원의원인 장 피에르 라파랭(Jean Pierre Raffarin)을 샤텔레로 유세장에서 만나고 싶어 했다. 라파랭 의원은 “정치적 행동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면서 “대신 공화국의 가치가 들어있는 큰 정책을 환대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라파랭은 유세장이 아닌 조엘로뷔숑 국제요리학교가 설립 중인 비엔느의 몽모리옹(Montmorillon)시로 마크롱을 불러 만났다. 그리고 결선투표에서 마크롱을 찍을 것을 밝혔다. 그 이유는 “르 펜의 몽모리옹 정책에 농촌의 성공적 상징인 조엘로뷔숑 국제요리학교 설립 의지와 지역 발전을 위한 외국자본 유치가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라파랭 의원이 마크롱을 몽모리옹으로 불러 지지선언을 한 것은 정치적 계산이 아닌 프랑스 농촌을 살리기 위한 차원이다. 르 펜은 세계화를 원치 않기 때문에 외국자본으로 농촌경제를 살릴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를 마크롱이 대신해 달라는 뜻이다.
이에 비해 우리 원로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말년에 자기의 정치적 이념이나 신념을 버리고 다른 색 옷을 입는 일이 허다하지 않은가. 민주당에서 잔뼈가 굵고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비서실장까지 지낸 한광옥씨가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옷을 입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되었을 때, 우리는 왜 그가 노년에 그런 선택을 하는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원로들의 이러한 예가 어디 한 둘인가.
이번 대선에서 김종인 전 의원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우리가 닮고 싶지 않은 찌그러진 초상화 그 자체다. 김 전 의원은 정치적인 철학이나 신념 없이 여야를 넘나들며 거침없는 행보를 해 왔다. 2012년 대선에서는 새누리당을 위해 일했고 지난해 총선에서는 민주당으로 자리를 옮겨 비대위원장을 지냈다. 그리고 최근에는 민주당을 탈당해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의 손을 잡았다. 명분은 개혁공동정부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구상 동기는 무엇인가.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인가? 설령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의 심오한 뜻과 명분이 있다고 치자. 그렇다 해도 그의 이러한 행동은 원로 정치인으로서 바람직한 모습이 절대 아니다. 차라리 정치적 행동을 접고 무너진 국가의 위상과 미래발전을 위해 여야를 넘나들며 조언하는 어른으로 남았다면 한줌의 명예라도 남았으리라. 그러나 이 정당 저 정당을 갈아타며 대접받을 곳만 찾는 그의 모습은 우리시대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는 것만 같아 씁쓸하다.
이러한 원로들의 정치적 행보는 우리를 착잡하게 한다. 프랑스의 원로들은 국가안위를 걱정하고 나아갈 길을 인도하는 나침반이 되어주는 반면, 한국의 원로들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 변절하기 일쑤다. 어른이길 포기하는 그들에게서 후배 정치인들은 과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선배가 명예를 금쪽같이 여기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 후배는 따라하게 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 않던가.
최인숙 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프랑스 정치현상을 잣대로 한국의 정치현실 개선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책 ‘빠리정치 서울정치(매경출판)’를 펴냈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