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랑스 모두 대통령 선거는 월드컵 축구경기를 방불케 한다. 축구 경기장에서 관중들은 열광하며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승리하기를 가슴 졸이며 지켜본다. 유권자도 마찬가지다. 승리한 쪽은 그간 있었던 모든 잡음을 승리의 축제 속에 묻는다. 그러나 패배한 쪽은 한 동안 내홍에 허덕이고, 심한 경우 패인이 상대에게 있다고 티격태격 싸우다 선거과정에 있었던 뒷이야기를 폭로하기 일쑤다.
그러나 성숙된 정치에서는 패인을 찾고 책임자가 정계 은퇴를 선언하는 경우도 있다.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공화당이 그랬다. 1958년 창당 이래 결선투표에 못 올라간 적이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대선주자로 뛰었던 프랑수아 피옹이 3위를 차지해 1차 선거에서 낙마하는 치욕을 겪었다. 선거에 패한 피옹은 오는 6월 열리는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평당원으로 남겠다고 밝혔다. 당 내에서는 스캔들로 승산이 없는 경주를 완주한 피옹에 대한 원성도 일부 터져 나왔다. 반면 피옹에 대한 원망 대신 당 재건이 시급하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정치인이 책임을 지고 정계를 떠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파리 1구 하원의원이자 전 대외무역 장관이었던 피에르 렐루슈(Pierre Lellouche)가 그 주인공이다. 거물급 정치인인 렐루슈는 먼저 이번 대선에서 피옹과 그의 파벌이 완주를 고집함으로써 집단적 자살 행위를 벌인 데 대해 통렬히 비난했다. 그리고 지난 26일 국민에게 보내는 신랄한 편지를 썼다. AFP 통신에 공개된 그의 편지는 정치인의 책임감이 어떤 것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심사숙고 끝에 나는 내 정치인생에 종지부를 찍고 오는 6월 총선에 나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곧 66세이고, 24년간 국회의원을 해왔다. 다음 세대를 위해 자리를 양보할 시기가 왔다고 확신한다. 쇄신이 필요하다고 나는 통감하고 있고 이를 프랑스인들과 함께 분명히 나누고자 한다. 이번 대선 1차전에서 공화당과 사회당이 얻은 표는 겨우 25%를 넘어 극우와 극좌가 득표한 40%보다 적었다. 우리는 40년 간 실패와 반혁신을 거듭한 전통적 정치를 근본적으로 해체해야할 상황에 직면했다. 수장도 없고 정치노선도 없는 우리 당은 요즘 엠마뉘엘 마크롱에게 투표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아주 도덕적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위해서는 위험하기 짝이 없고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렐루슈는 70년대 말부터 주거니 받거니 해 온 프랑스 우파정부와 좌파정부는 세계화라는 도전에 근본적으로 적응할 줄 몰랐다고 분석하며 “우리 세대의 집단적 실패에 책임을 통감한다”고 덧붙였다. 프랑스 유권자들의 정치에 대한 실망이 40년 간 누적되어 온 정치권의 실패에 있음을 밝히고 그 책임을 피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책임질 줄 모르는 한국 정치인들과 극명하게 엇갈리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4·13 총선에 참패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은 쇄신은커녕 그 누구도 실패에 대해 책임지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그들이 만든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농단의 주인공이 되어 탄핵될 때도 책임을 지기보다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 결국 당이 쪼개지기까지 했다.
정치는 우리의 인생과도 흡사하다. 실패할 때도, 성공할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실패했을 때 패인을 찾고 책임을 통감해야 재생과 도약의 길이 열린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점을 요즘 대선 정국에서 두 보수당을 지켜보며 여실히 느낀다.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고 거친 독설만 뿜어대는 한국당 홍준표 후보. 한때 박근혜 대통령의 사진을 끝까지 사무실에 걸고 보수표를 모으고자 했던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 이들은 서로 보수의 적자가 자기라고 싸워대며 보수재건을 노래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보수를 재건할 의지는 정녕 있는 것일까. 진정 그들에게 보수를 재건할 의지가 있다면 대선에 나와 서로 적자임을 자처하지 말고 정계를 은퇴하는 편이 낫다. 그들은 박근혜 정부를 만든 일등공신들이지 않던가.
경기에 패하면 감독과 선수를 바꿔야 하는 것은 정치도 마찬가지다. 한국 보수정당들이 정녕 재건을 원한다면 책임자들부터 교체하라. 책임을 져야할 자들이 대선에 나와 서로 손가락질하며 싸우는 꼴은 볼썽사납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지 않던가. 보수를 망가뜨린 자들이 보수의 재건을 노래하지 말고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양보하라. 그래야 진정한 보수는 재탄생할 수 있다.
최인숙 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프랑스 정치현상을 잣대로 한국의 정치현실 개선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책 ‘빠리정치 서울정치(매경출판)’를 펴냈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