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원석 기자] 전통적인 신약개발 방식은 변화하고 있다. 과거 제약산업은 한 회사가 신약후보 발굴에서부터 임상, 허가, 판매까지 모두 진행하는 폐쇄적 의약품 개발 전략을 보였다. 모든 제품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모든 정보를 엄격히 통제했다.
4차산업혁명 시대에 글로벌 제약업계에선 인공지능을 활용한 신약개발에서 앞서 나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R&D 생산성 확대와 비용 절감에 내몰린 글로벌 제약사들은 빗장을 풀고 수년 전부터 인공지능과 기술융합에 나서고 있다.
신약개발에 인공지능 활용 범위는 무궁무진하다. 신약개발을 위해선 유전, 질병, 환자, 화학 정보 등 광범위한 임상 데이터를 분석해야 한다. 새로운 데이터는 끊임없이 업데이트되기 때문에 사람이 모든 자료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방대한 데이터 통합과 관리는 인공지능이 진가를 발휘한다. 사람이 6개월~1년 동안 걸리던 임상 문헌 검색 기간을 인공지능은 단 1~2주로 단축할 수 있다. 신약개발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배영우 한국제약바이오협회 4차산업 전문위원은 "일반적으로 신약 개발을 위해 한명의 연구자가 조사할 수 있는 자료는 한해에 200~300건 정도가 된다"며 "인공지능은 한 연구에서만 100만건 이상의 논문을 읽을 수 있다. 동시에 미국에 등록돼 있는 400만명 이상의 임상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제약사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은 엑스사이언티아와 제휴를 맺어 약물 설계와 신약후보물질 발굴에 인공지능을 활용하고 있다. GSK는 인공지능을 이용해 평균 5년 이상 걸리는 신약후보물질 탐색 기간을 1년으로 줄이고, 비용도 최소 4분의 1수준으로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스스로 학습하면서 의학적 근거를 판단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서로 다른 신약 물질의 상호작용을 분석하고 예측한다. 미국 바이오벤처 아톰와이즈가 개발한 인공지능 '아톰넷'은 하루에 100만개의 화합물을 선별할 수 있다. 글로벌 제약사 사노피는 엑스사이언티아와 제휴를 체결해 제품군 중에서 서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약물 조합 탐색에 인공지능을 활용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이미 판매되는 신약의 처방 질환 확대나 새로운 효과 발명에도 쓰인다. 실제로 발기부전치료제로 유명한 화이자의 '비아그라'는 애초에 다른 용도로 개발된 치료제다. 화이자는 협심증 치료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아예 발기부전 치료제로 연구방향을 선회했다. 인공지능이 이 같은 '신약의 재발견'을 가속화시킬 것이라는 설명이다.
배영우 전문위원은 "입덧 약을 에이즈 치료제로 개발하는 등 판매되지 않는 약들을 재사용하기 위한 연구에 인공지능이 쓰일 수 있다"며 "단순히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효과를 통해 수많은 문헌 정보의 상관성을 묶어서 가설을 세우고 후보물질 찾는 일을 인공지능이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맞춤형 의약품도 등장할 전망이다. 높은 정확도와 경제적 측면에서 효율성을 가지는 인공지능을 의약품 처방과 진료에 사용하는 사례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같은 의약품을 투약해도 연령, 체중, 성별, 인종 등 생물학적 요인이나 흡연, 음주, 생활습관 등 환경적 요인에 따라 약물 반응이 천차만별이다. 인공지능은 개인 유전체 정보, 진료기록, 생활습관 정보 등을 바탕으로 가장 치료 효과가 높은 개인 최적화 의약품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질환 진단 및 판독에도 인공지능이 활용된다.
인공지능이 개발한 신약이 등장할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글로벌 제약사 얀센은 지난해 인공지능기업 베네볼런트와 신약후보물질 평가 작업에 대한 독점 라이센스 제휴를 체결했다. 양사는 난치성 질환 신약 개발에 인공지능을 활용하겠다는 방침이다. 글로벌 제약사 2위인 화이자는 IBM의 인공지능 '왓슨 포 드러그 디스커버리'를 이용해 면역 및 종양학 연구와 신약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화이자가 암 관련 자료를 제공하면 왓슨이 신약 발굴과 병용 요법 연구를 분석하는 형태다. 전세계 복제약 업체 1위 테바는 호흡기 및 중추신경계 질환 분석 등 신약개발을 위해 IBM과 업무협약 체결했다. 안실리코 메디슨과 아톰와이즈, 버그 등 인공지능 스타트업 업체들은 독자 개발한 신약 개발 플랫폼을 바탕으로 의료기관, 대학 등과 글로벌 협력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제약사와 정보통신기술(ICT) 기업들 사이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한 신약을 개발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며 "인공지능은 신약개발 성공률을 높이는 등 제약산업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롭 하이(Rob High) IBM사 기술개발책임자가 지난해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인공지능 국제 심포지엄'에서 인공지능 '왓슨'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IBM은 글로벌 제약사 화이자와 제휴를 체결해 신약개발에 왓슨을 활용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원석 기자 soulch39@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