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000830)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하도록 압력을 넣은 혐의로 기소된 문 전 이사장은 지난 14일 열린 2심 재판에서 1심과 같은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서울고법 형사10부 재판부는 "문 전장관은 연금공단에 대한 지도감독권을 남용해 복지부 공무원을 통해 홍 전 본부장으로 하여금 합병에 찬성하도록 유도하게 하는 등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고 판단했다. 함께 기소된 홍완선 전 기금운용본부장에 대해서도 1심과 같은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이 내려졌다. 이들은 특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 대주주에게 재산상 이익을 준 반면 연금공단에는 손해를 가하는 등 죄질이 좋지 않다고 재판부는 질책했다. 2심까지의 판결결과를 통해 사건의 전모는 거의 드러났다.
문 전 장관은 연금전문가이고 홍 전 본부장은 자산운용의 전문가이다. 두 사람 모두 해당 분야에서는 국내 최고 수준의 전문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 지식과 경험을 발휘하도록 필요한 권한도 부여돼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주어진 권한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았다.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바로 이런 ‘무책임’이 준엄한 심판을 받은 셈이다.
이에 비해 지난 7일 취임한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제16대 이사장에게는 ‘비전문가’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김 신임 이사장은 국회의원 시절 보건복지위원회 소속으로 나름대로 활동했다. 그럼에도 ‘전문성 없는 낙하산 인사’ 또는 ‘코드인사’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이는 물론 일부 야당이나 보수언론에서 제기되는 주장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김성주 새 이사장의 경력이 문 전 장관이나 홍 전 본부장에 비해 아무래도 모자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국민연금은 오늘날 600조원 규모의 자산을 가진 세계 3위의 연금이다. 국민의 노후생활을 책임지는 공적연금으로서, 그 책임이 막중하다. 따라서 연금과 자산운용을 잘 아는 전문가가 이끄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 점에서는 문 전 장관이나 홍 전 본부장은 제격이었다.
그렇지만 진정한 전문가는 단순히 전문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은 아니다. 전문적인 지식과 함께 국민연금의 존재이유와 목적을 잘 아는 사람이다. 국민 노후생활을 뒷받침한다는 관점에서 유익한 판단과 결정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외부의 청탁과 압력을 배격할 의지와 소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 의지와 소신을 갖지 않으면 오염되기 쉽다. 오염된 전문지식은 오히려 더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그건 마치 잘 숙성된 포도주에 독소나 이물질이 섞이는 것과 다름없다. 문 전 장관이나 홍 전 본부장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고 하겠다. 그 결과 국민연금에 큰 손실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해로운 결과를 초래했다.
김성주 새 이사장은 취임하면서 “국민이 국민연금의 주인”이라며 국민의 신뢰회복을 강조했다. 공단 스스로 외압과 유혹을 '왜 막아내지 못했던가'란 내부적 반성과 함께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외부의 부당한 간섭과 개입을 막아내겠다는 약속도 했다. 문제의 핵심을 잘 짚었다. 너무나 지당한 말이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럼에도 새삼 반가운 것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과정에서 국민연금이 행한 잘못된 역할에 대한 ‘추억’이 아직 생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민연금이 20일 열린 KB금융의 노조 추천 사외이사 선임에 찬성한 것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하지만 이는 국민연금이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라 여겨진다. 과거 국민은행이 잘못된 해외투자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던 경험을 돌이켜 본다면 충분히 이해된다. 올해 국정감사에서는 현대증권 고가인수 의혹이 새로 제기됏다. 그런 잘못된 결정이나 논란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견제해 주기를 노조추천 이사에게 기대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투자대상 기업의 기업가치를 지키기 위한 방안의 하나인 셈이다. 외압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면 특별히 문제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모든 것은 필연에 따라 움직인다고 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찬성한 과거의 결정은 필연에 역행하는 것이었지만, 이번 결정은 필연에 순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국민이 맡긴 노후자금을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책임감이다. 그 책임감에 따라 최대한 합리적인 방안을 찾는 것이다.
차기태(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