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적폐 청산과 과학

입력 : 2017-11-30 오전 6:00:00
중국이나 인도, 메소포타미아가 아니라 이오니아였다. 기원전 6세기, 인류 최초의 불순한 사고와 사상이 그곳에서 태동했다. 그곳 사람들은 이전에 없던 질문과 의문을 던졌다. 답도 찾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질병은 신이나 악마가 만든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왜 이오니아였을까? 탈레스, 히포크라테스, 데모크리토스, 피타고라스의 철학(혹은 과학)은 중국이나 인도, 메소포타미아가 아니라 왜 그곳에서 꽃을 피웠을까? <코스모스> 저자 칼 세이건의 분석은 이렇다. 이오니아는 섬나라였다. 중앙집권적인 통치가 불가능한 환경이었다. 중앙권력의 부재(不在)는 자유로운 사상이 꽃 피울 수 있는 밑거름이었다. 그렇게 자유로운 환경에서 그들은 “신이 아니라 자연과 물리적 힘의 결과로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발상의 대전환을 이루었다. 혼돈(Chaos)의 세상에서 질서(Cosmos)를 발견한 것이다.
 
17세기에는 네덜란드가 그랬다. 자유로운 철학과 사고를 갈망하는 당대의 철학자, 수학자, 예술가가 네덜란드로 모여들고 그곳에서 태어났다. 스피노자, 데카르트, 존 로크, 렘브란트 등이 주인공이다. 네덜란드는 당시 유럽 국가로는 드물게 왕이나 황제가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공화국이었다 ‘20세기의 이오니아’는? 칼 세이건은 이 질문에 미국이라고 답한다. 이런저런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어찌 됐든 미국은 자유와 기회의 나라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전 세계 철학자, 사상가, 과학자가 모여들었다. 최소한 정치적 민주주의는 완성했다. 과학기술은 그런 곳에서 꽃을 피운다.
 
그렇다면 21세기 대한민국은? 2017년 3월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됐다. 2014년 4월 세월호가 침몰했다. 2012년 12월 박근혜가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됐고 5년 전 이명박이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2017년 12월, 박근혜는 감옥에 있고, 이명박은 감옥과 가까워지고 있다. 10년의 세월이었다.
 
이 기간 한국에서 합법과 합리성과 이성은 설 자리를 잃었다. 불법과 협잡이 판을 쳤다. 이득은 사적으로 취하면서 손실은 철저하게 공적 부담으로 돌렸다. 자유로운 사상과 생각은 불순한 사고로 치부됐다. 반대자들의 명단을 모아 블랙리스트를 만들었으며, 감시와 사찰을 일삼고, 테러에 가까운 댓글 공격을 퍼부었다.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은 적이었다. 야만의 시대였다.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에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언제부터인가 이 말은 금과옥조였고 당위였으며 시대를 관통하는 레토릭이었다. 경제나 산업 분야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과학기술에서는 이런 문장은 일종의 수학 공식처럼 통용됐다. “우리는 2006년 1인당 GDP 2만 달러를 돌파했다. 하지만 아직도 3만 달러를 넘지 못하고 있다. 빠른 추격자 전략으로 여기까지 왔다. 3만 달러를 넘어 4만 달러로 가려면 과학기술의 선도자 전략이 필요하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우리가 2만 달러에서 3만 달러로 빨리 진입하지 못하는 이유는 패스트 팔로워 전략 때문만은 아니다. 만연한 부패와 부정, 불합리 때문이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 때문이다. 노키아와 핀란드의 사례도 유행했다.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하고 혁신에 실패했을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 지 노키아와 핀란드를 보라는 거다. 역시 거짓말이다. 노키아와 핀란드는 일부 대기업에 국가 경제를 의지했을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 잘 보여준다. 노키아는 몰락했지만, 핀란드는 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튼튼한 강소기업이 늘어나며 더 부강한 나라가 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적폐를 청산하면 과학도 발전한다. 부패와 불합리가 사라지면 경제도 발전한다. 우리보다 빨리 1인당 GDP 3만 달러에 진입한 나라 중에는 패스트 팔로워도, 퍼스트 무버도 있었다. 하지만 부패와 부정에 관대한 나라는 없었다. 부패와 부정, 불합리가 사라져야 경제가 발전한다. 적폐를 청산해야 과학도 발전한다. 언젠가 읽었던 책 한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는 눈만 뜨면 정치인들과 대통령의 어이없는 주장을 묵묵히 들어왔다. (…) 우리가 아무리 반도체를 잘 만들고 우주선을 쏘아 올린다고 하더라도 ‘가장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서의 과학’이 사회에서 체화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야만의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종필의 ‘대통령을 위한 과학에세이’ 중에서>”
 
김형석 <과학 칼럼니스트·SCOO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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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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