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기자] 자사주 규제가 국회 문턱에 걸려 장기 표류하면서 막차를 타려는 재벌 편법이 난무하고 있다. 비판 여론을 의식해 스스로 자사주를 처분했던 분위기도 잠시, 막바지 수혜를 잡으려는 재벌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올해 마지막 임시국회가 11일부터 사흘째 진행되고 있으나, 여야간 첨예한 대립으로 ‘빈손국회’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상법 개정안 등 쟁점법안은 통과가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다수의 자사주 규제 법안도 마찬가지다. 재계의 반대가 심해 여야 합의 가능성이 낮게 점쳐진다. 인적분할시 자사주 의결권이 부활하는 소위 ‘자사주 마법’이 재벌 편법으로 지목되면서 관련 법 개정안이 쏟아졌다. 자사주 신주 배정 금지, 인적분할 전 자사주 소각, 자사주 신주 배정시 의결권 제한 등 공정거래법, 상법, 자본시장법에 걸쳐 폭넓게 마련됐다. 하지만 모두 국회에 묶인 채 공연한 으름장만 놓고 있다.
그사이 다수 기업이 자사주 티켓을 사용했다. 올 들어 지주회사 전환 사례는 30곳이 넘는다. 대부분 자사주 활용이 가능한 인적분할 방식이다. 자사주 비중이 작아 논란에서 제외된 곳도 있으나, 비판에 귀를 닫은 곳들도 다수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인적분할 주주총회 과정에서 노조 반대를 무릅쓰고 지난 4월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현대중공업을 현대로보틱스 등 4개 회사로 인적분할하면서 당시 보유 중이던 자사주 13.37%를 활용, 지주요건을 채우며 지배주주인 정몽준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지난 5일 이사회를 열고 인적분할을 결정한 현대산업개발 역시 자사주를 활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내년 5월1일 지주사 HDC와 HDC현대산업개발 신설회사를 분할하는 가운데, 3분기 말 기준 자사주 7.03%를 갖고 있다. 앞서 지난 1월 11년 만에 자사주 매입을 결정하며 4개월에 걸쳐 기존 2.39%였던 자사주를 늘린 바 있다. 정몽규 회장이 보유한 현대산업개발 지분은 현재 13.36%에 불과하지만 인적분할 후 자사주 부활과 주식스왑 등을 통해 지배력을 확대할 수 있다.
지주사 전환에 앞서 자사주를 적극 매입한 뒤 인적분할 후 자회사의 자사주에 신주를 배정하는 방식은 재계의 오랜 관행이다. 지주회사는 추가 지분 매입 비용 없이 자회사에 대한 공정거래법상 지분 요건(상장사 20% 이상)을 충족할 수 있다. SK, LG, GS, 한진, CJ, LS 등이 과거 인적분할을 통해 지주회사로 전환했다.
재계에서는 자사주가 상법에서 인정하는 자산으로 자유롭게 활용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자사주 없이 적대적 인수합병 등 경영권 방어가 어렵다는 우려도 단골 메뉴다. 하지만 반대편에서는 자사주 활용으로 지배주주가 너무 많은 수혜를 받는다고 비판한다. 상대적으로 소액주주의 의결권이 침해받는 문제도 발생한다. 인적분할 후 자회사는 자사주만큼 새로운 의결권이 생겨 기존 소액주주로서는 상대적으로 의결권이 약해진다. 분할 전 자사주를 많이 보유할수록 이런 불평등이 심해진다.
과거 상법에서는 기업의 자사주 매입을 원천적으로 금지했다. 기업의 주인은 주주인데, 기업이 자사주를 사면 기업 스스로 주인이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주주 출자금으로 주식을 사는 것은 자본 충실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상법에는 주식회사가 법적 자본금에 상당하는 재산을 보유해 채권자를 보호하고 자본의 충실을 기해야 한다는 자본충실의 원칙이 규정돼 있다. 하지만 2012년 상법 개정 이후 이사회 결의만으로도 자사주 취득이 허용되면서 재벌의 편법이 늘어났고, 이로 인한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2015년 5월 삼성물산 합병 사례가 대표적이다. 합병 전 삼성물산의 우호지분 비중은 높지 않았다. 엘리엇의 반대로 삼성은 1주라도 더 우호지분을 늘려야 하는 상황에서 자사주 5.8%를 모두 KCC에게 매도했다. 백기사인 KCC는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고, 결국 지배주주 의사대로 자사주를 활용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이후 삼성전자의 인적분할 가능성도 대두되며 자사주 부활을 노릴 것이란 비판과 함께 다수의 규제법안이 생겨났다. 삼성전자는 인적분할을 검토했으나 결국 지난 4월 이를 포기하고 자사주 전량 소각도 결정했다. 이달 1일 출범한 SK디스커버리 역시 지주사 전환 과정에 SK케미칼 인적분할을 거쳤으나 기존 자사주는 전량 매각 또는 소각해 논란을 피해갔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