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함께하는 냉장고

입력 : 2017-12-26 오전 6:00:00
자본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빈부격차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책 <21세기 자본론>에서 세계 최상위 부유층 1%(약 7600만 명)가 전 세계 부의 절반을 차지하고, 상위 10%는 전체 부의 90%를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격차는 갈수록 확대되어 가난한 이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과 이탈리아에 이어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빈부격차율이 높다. 격차를 줄이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내려지지 않는다면 어두운 미래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며 나타나는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증가한다는 점이다. 대형 슈퍼마켓의 찬란한 불빛 아래 먹거리가 태산을 이루고, 팔다 남은 식품들이 처치곤란으로 썩어가는 반대편에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구걸을 하고 쓰레기통을 뒤진다. 자본주의의 역설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유엔 식량 농업기구(Organisation des Nations unies pour l’Alimentation et l’Agriculture)에 따르면 전세계 곳곳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물의 3분의 1이 버려지고 있다. 1년에 13억톤, 1인당 160kg을 버리는 셈이다. 돈으로 환산하면 1조 달러에 이르며 1인 기준으로 환산하면 143 달러이다. 프랑스에서는 매년 생산에서 소비까지 1인당 90~140kg의 음식물을 버린다. 각 프랑스인들이 쓰레기통에 버리는 식료품도 연간 20~30kg 수준이며 이로 인해 120억~200억 유로의 손실을 가져온다. 프랑스는 이러한 낭비를 막기 위해 2015년 12월 국회에서 관련 법을 만장일치로 만들었으며 지방정부와 시민들도 동참 중이다.
 
지난 금요일 파리 12구 도메닐(Daumesnil) 거리 212번지 누보 로뱅송(Nouveaux Robinsons) 상점 앞에 이상한 냉장고 하나가 등장했다. 일명 ‘연대 냉장고’(frigo solidaire)로 불리는 이 냉장고는 13구에 이어 파리에 두 번째로 등장했다. 음식물의 낭비를 막고 지역 연대를 진작하는 것이 냉장고의 설치 목적이다. 운영 방법은 간단하다. 각 상점에서 팔리지 않은 채소나 신선한 제품의 일부를 냉장고에 담아놓으면 지나가는 행인 누구나 가져갈 수 있다.
 
두 번째 연대 냉장고를 운영하는 누보 로뱅송 가게의 관리인은 “냉장고가 설치된 지 24시간 만에 벌써 애호가들이 생겼다”며 “금요일 넣어둔 모든 것들을 다 가져갔다”고 말했다. 파리시장의 보좌관이면서 ‘사회적 연대 경제, 사회적 혁신과 순환경제’를 담당하는 앙투아네트 길(Antoinette Guhl)은 “이 가게에는 매주 약 100kg의 팔리지 않은 식료품이 있다. 이 중 3분의 2는 구호단체에 기부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아무나 가져갈 수 있게 냉장고에 비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관련 단체인 캅 우 파 캅(Cap ou pas cap) 공동 설립자 장 크리스토프는 “이 구역 사람들 역시 바캉스를 떠나기 전날 밤 필요없는 음식물을 가져 와 냉장고를 채울 수 있을 것”이라며 “식품의 낭비를 막고 지역 연대를 진작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단체는 도메닐에서 조금 떨어진 펠릭스 에부에(Felix-Eboue) 광장에 이미 기부상자를 설치했다.
 
13구 라메(Ramey) 거리 캉틴(Cantine) 레스토랑에 지난 6월 설치된 첫 번째 냉장고는 이미 결실을 맺고 있다. 어머니와 함께 레스토랑을 경영 중인 두니아 메불(Dounia Metboul)은 “처음에는 전혀 순조롭지 않았다. 사람들은 의아해했고 원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는 매일 50명 정도의 사람들이 냉장고에 비치된 식품을 회수하러 온다. 우리가 팔다 남은 상품을 이 구역에 사는 사람들이 가져간다. 성과가 있어 놀랍다”고 기뻐한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캅 우 파 캅’은 파리시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파리시는 11월에 1만5000 유로의 보조금을 지급했다) 2018년 여름까지 시내 다른 구역에 총 25대의 새 냉장고를 더 설치할 예정이다. 지역 주민이자 퇴직자인 파비안은 “이 팔다 남은 기증품은 나처럼 퇴직한 사람들에게 큰 보탬이 된다”며 환영했다. 이 연대 냉장고는 특히 식구가 많은 가정과 노숙자,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다.
 
파리에 등장한 이 이상한 냉장고는 작은 아이디어가 낳은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선을 베푸는 사람과 혜택을 받는 사람 양쪽 모두가 기쁨에 충만해 있다. 이 세상에 기대할 것 하나도 없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파리의 이상한 냉장고는 연말연시 나눔의 미학을 실천하라는 종소리 같다.
 
한국에서 발생하는 음식물 쓰레기는 하루 평균 1만4000톤, 연간 500만톤 이상이다. 300톤 무게의 여객기 1만7000대 분량의 쓰레기가 버려지는 셈이다. 이 쓰레기는 매년 3%씩 증가하고 있으며 처리비용도 연간 8000억원에 이른다. 이러한 낭비를 막기 위해서는 프랑스처럼 관련 법을 만들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시민사회가 연대해야 한다. 이야말로 한국정치인들이 수없이 강조하는 진정한 ‘협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최인숙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프랑스 정치현상을 잣대로 한국의 정치현실 개선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책 ‘빠리정치 서울정치(매경출판)’를 펴냈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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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