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기자] 재계의 신년 구상에서 ‘사회적 가치’가 약진했다. 탄핵정국을 거치면서 정경유착의 실태가 고스란히 드러난 데다, 여전히 70% 안팎의 높은 국정운영 지지도를 보이는 문재인정부를 의식한 결과로 보인다. 서슬 퍼런 재벌개혁 정책 기조도 무시하기 어렵다. 과거 신년사의 단골 메뉴였던 ‘위기 극복’은 한결 누그러졌다. 올해 조선을 제외하고 특별히 불황 걱정이 없을 정도로 산업 전망이 좋다. 대신 불확실성 확대와 시장 급변에 따른 혁신 주문은 계속됐다.
2일 주요 그룹들의 2018년 신년사를 종합하면,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보호무역과 4차 산업혁명 등 시장 변동성 확대를 경계한 모습이 뚜렷했다. 그럼에도 경영위기를 크게 우려한 곳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반도체의 슈퍼사이클, 석유화학 호황 등 전반적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달라진 점은 ‘사회적 가치’ 의 부상이다. ‘사회’, ‘상생’ 등의 키워드가 전면에 등장했다. 기존 말미에나 언급된 수사적 표현에서 우선적 실행가치로 격상했다. 세대교체를 통해 신년사를 발표하는 ‘얼굴’이 바뀐 점도 특이점이다.
그룹별로,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와병으로 2015년부터 회장 명의의 신년사가 없다. 주력인 삼성전자의 경우 지난해 권오현 부회장(현 회장)이 신년사를 맡았으며, 올해는 김기남 사장이 나섰다. 새롭게 출범한 부문 3인방 중 김 사장이 최고참이다. 지난해 신년사는 갤럭시노트7 실패에 따른 경영쇄신이 골자였다면, 올해는 실적잔치에 따른 자만을 경계하며 초심을 강조했다. 특히 실행 목표로 제시한 3가지 항목 중 ‘고객과 사회로부터 사랑받는 회사’가 포함된 게 눈에 띈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은 책임경영, 미래기술 혁신 등을 주문한 것이 지난해와 비슷했다. 특히 “권역별 책임경영 체제의 확립을 통해 판매 생산 손익을 관리하고, 고객의 요구에 민첩하게 대응할 것”을 주문했다. 중국과 미국 등 주요 시장의 부침과 신흥시장 개척의 필요성 등으로 현장이 중요해졌다. 사회적 가치 관련 언급은 끝부분에 있었다. 협력사 동반성장, 일자리 창출 등 시류에 맞춘 키워드를 사용했다.
SK 신년사는 지난해 ‘딥 체인지(근본적 혁신)’를 위한 패기 등 정신무장을 강조한 데 비해 올해는 ‘온기’가 넘친다. 최태원 회장은 사회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와 동일선상에 올려 ‘사회적기업 전도사’로서의 기조를 이어갔다. 올해를 'New SK' 원년으로 삼고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의 ‘더블 바텀 라인’ ▲공유인프라 ▲글로벌 경영 등을 과제로 제시했다. 3개 중 2개가 사회적 가치 창출로, 획기적인 중심이동이다. 일반의 경영가치에 대한 통념도 깼다.
LG는 처음으로 구본준 부회장이 신년사를 발표했다. 승계 과정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맡으며 경영 실무를 총괄하고 있다. 지난해 ‘창업정신’의 초심으로 돌아가 경영혁신을 일구자고 했던 구본무 회장의 바통을 이어 “고정관념을 과감히 버려 사업 방식과 구조를 바꾸자”고 했다. LG는 ‘국민과 사회로부터 신뢰받는 기업’이 되자는 경영 방침을 매년 우선순위에 올렸다. 올해도 “정도경영을 바탕으로 경영 투명성을 높이는 등 국민 기대에 부응하자”는 다짐을 이어갔다.
롯데는 지난해 100년 기업 도약의 비전을 수립하고 올해는 본격적 실행에 나서기로 했다. 그 중에서도 신동빈 회장은 고객 삶의 가치, 디지털 전환, 브랜드가치 제고와 함께 “주변과 나누고 함께 성장하며 존경받는 기업”을 목표로 내놨다. 경영권 분쟁을 마무리하고, 가슴 졸였던 1심에서도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구속을 피한 만큼 이미지 회복에 전력을 다한다는 방침이다.
포스코는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이해 새로운 도약이 목표다. ICT 융합을 통한 사업의 스마트화, 에너지 및 소재 신성장 사업 육성 등 성장전략이 주를 이뤘다. 권오준 회장은 “멀리 보고 밝게 생각하는 시원유명(視遠惟明)의 분발”을 주문했다. 허창수 GS 회장은 ‘절차탁마(切磋琢磨)’를 언급하며 차별화된 경쟁력 확보를 강조했다. 마무리는 “상생경영을 통한 건전한 경제 생태계 구축에 일조하자”고 맺었다.
김승연 한화 회장도 사회적 가치에 힘을 줬다. 김 회장은 “장수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지만 기업은 신용을 걸어야 한다"며 "이익을 남기기에 앞서 (협력사 상생, 약자 보호 등을 통해)고객과의 의리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