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한영 기자] 5~6일 이틀에 걸쳐 방북한 우리측 ‘대북 특별사절대표단’에 대해 북측은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이례적인 환대를 보였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적극적인 남북관계 개선 의지가 담긴 조치로 보인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이끈 특사단이 5일 평양에 도착한 직후부터 이같은 분위기는 감지됐다. 청와대에 따르면 북측은 특사단이 탄 비행기가 순안공항에 착륙한 후 리현 통일전선부 실장을 기내로 들여보내 영접했다.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맹경일 통일전선부 부부장도 공항에서 특사단을 맞았다. 북측 대남라인 주요 인사가 대부분 나선 셈이다.
특사단이 도착 3시간 만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접견하고 만찬까지 진행한 것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북한은 그간 경호상의 이유로 최고지도자의 일정을 사전에 공개하지 않았다. 면담이 잡히더라도 정확한 시간을 막판에 공지하거나 협의 과정에서 불발되는 경우도 있었다. 지난 2003년 1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방북했던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지 못한 채 귀환한 것이 그 예다.
김 위원장과의 면담·만찬이 노동당 본관 내 진달래관에서 이뤄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과거 방북한 특사단은 주로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찬을 진행해왔다.
이번에 남측 고위인사에게 처음으로 공개된 노동당 청사는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와 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 등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회의가 열리는, 북한 정치의 ‘핵심’이다. 김 위원장이 사용하는 집무실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핵·미사일 개발에 공헌한 과학자·기술자, 전투기 조종사 등 공로자들을 불러 기념사진을 찍을 때 배경으로 삼는 장소이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방한 당시 청와대로 초청한 것과 같은 격이다. 면담·만찬에 소요된 시간도 5일 오후 6시부터 4시간12분이나 되며, 리설주가 북한의 퍼스트레이디로서 만찬에 동석한 것도 예상치 못한 장면이다.
특사단에게 숙소로 내줬던 고방산 초대소에 대한 평가도 나오고 있다. 고방산 초대소는 평양 대동강변에 위치해 있으며 북한을 방문하는 외국 귀빈용 고급 휴양시설로 2013년 방북한 에릭 슈미트 당시 구글 최고경영자(CEO) 등이 묵었던 곳이다. 우리측 사절단이 도착할 때는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이 나와 맞이했다. 북측의 이같은 조치를 두고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북측의 영접인사 면면이나 경호, 숙소 준비상황 등으로 볼 때 북측이 남측 대표단 환대를 위해 많은 준비를 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특사단이 전해왔다”고 설명했다.
특사단과 김 위원장 간 협의 내용도 괄목할 만한 성과다. 북한 노동신문은 이날 만찬 소식을 전하며 “최고영도자(김정은) 동지께서는 남측 특사로부터 수뇌 상봉과 관련한 문재인 대통령의 뜻을 전해 들으시고 의견을 교환하시었으며 만족한 합의를 보시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해당 부문에서 이와 관련한 실무적 조치들을 속히 취할데 대한 강령적인 지시를 주시었다”고 덧붙였다. 정상회담 시기·의제 교감 여부와는 별개로 남북관계 발전 방향에 대한 큰 틀의 합의 가능성은 높다. 청와대 관계자도 “실망스럽지 않은 결과로 안다”며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된 내용도 포함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북한의 이같은 움직임을 두고 김준형 한동대 교수는 국회에서 열린 정의당 주최 ‘포스트 평창, 한반도 정세와 해법’ 토론회에서 “북한의 태도가 과거와 비교해서 매우 유연해졌다”며 “(김 위원장) 신년사에 따른 실행이라고 하더라도 대화모드의 진정성은 매우 크다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문재인정부의 외교정책 기조인 ‘한반도운전자론’ 뒷받침을 위해서도 남북관계 안정이 필요한 점을 감안할 때 북측의 이같은 반응은 호재다.
김 위원장의 남북관계 개선의지를 충분히 확인한 만큼 우리 정부가 어떤 후속조치를 내놓을지 주목된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지금 북한은 미국이 아니라 남북관계에 거의 ‘올인’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를 분리할 수는 없지만 돌아가지 않는 미국의 톱니바퀴 때문에 남북관계 톱니바퀴도 멈출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남북 정상회담이 가시권에 들어왔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다만 정부정책의 우선순위를 한미 간 소통과 북미대화를 우선으로 하고 남북정상회담 개최로 이어가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는다.
수석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앞줄 왼쪽)이 5일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있다. 사진/청와대
최한영 기자 visionch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