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와인도 결국 술이다

입력 : 2018-03-20 오전 6:00:00
전 세계에서 술을 가장 많이 마시는 나라는 어디일까. <유로모니터 인터내셔널>이 2016년 전 세계 모든 술 판매량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한국의 소주 브랜드가 10년째 180개국 증류주에서 각각 1·3위를 차지했다. 소주 판매량은 위스키 조니워커 판매량의 약 5배다. 소주만 그러한가. 요즘 서울 여기저기엔 와인포차나 와인바가 부쩍 등장하고 있다.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이 그만큼 늘어나고 있다는 증거다. 2014년 한국 와인 소비량은 2010년 대비 28.6% 늘어나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 호주, 일본, 뉴질랜드, 홍콩에 이어 여섯 번째로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비넥스포(VINEXPO)와 국제주류시장연구소(IWSR)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한국의 와인 소비량은 2015년보다 16.2%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쯤 되면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술을 많이 마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다른 조사결과도 있다. 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한국인은 50세까지 밥보다 더 많은 양의 술을 마신다. 사회생활이 가장 활발한 30~49세는 하루 음주량이 178그램으로 백미 섭취량(156그램)보다 많다. 매일 소주 1~2잔을 마시면 간암에 걸릴 위험성이 1.33배 증가한다는데, 한국에서는 술에 대한 위험성은 통 이야기하지 않고 담배만 규제하느라 혈안이다.
 
2주 전 프랑스에서는 포도주를 놓고 9명의 의사들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게 분개하는 일이 있었다. 지난달 말 마크롱 대통령은 농업박람회 개회식장을 찾아 “나는 점심에도, 저녁에도, 포도주를 마신다. 내가 대통령인 한 에뱅법(알코올음료 광고 제한)을 강화하기 위한 개정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르주 퐁피두 전 대통령이 자주 사용한 “그런 것으로 성가시지 마라”는 문구도 인용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젊어서 독한 술이나 맥주로 아주 빠르게 취할 때 공중보건학적 징후가 있다. 그러나 와인은 그렇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렇게 포도주 친선대사로 나서 포도주를 보급하려는 마크롱 대통령의 제안은 알코올 소비에 반대하는 의사들을 충격에 빠지게 했다. 의사들은 대통령의 제안을 정면 반박하며 ‘포도주가 다른 알코올 타입 음료보다 덜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마시는 양이 많을수록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프랑스인들의 알코올음료 소비가 반세기 전부터 줄고 있다지만, 아직까지 유럽에서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간지 르 피가로(Le Figaro)에 따르면, 프랑스 성인 한 사람이 1년간 마시는 알코올 양은 12리터다.
 
‘포도주는 술이다’라는 제목의 문서에 서명한 9명의 의사는 마크롱 정부를 “과학적 증거를 부정하는 정부”로 규정하고, 공익보다 술 산업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들은 프랑스에서 술 소비가 담배에 이어 암을 유발하는 두 번째 원인이 되고 있고, 술로 인해 매년 5000여 명이 죽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는 한편 정부와 국회에 ‘술에 대한 국가적 플랜’을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 르 몽드 신문도 지난달 28일자에 의사들이 술에 대한 마크롱 대통령의 입장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사실 프랑스에서 포도주는 국민적 ‘토템’이다. 그 누구도 감히 반격할 수 없는 소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지난 2월7일 아네스 뷔젱(Agnes Buzyn) 보건부 장관은 공영방송 <프랑스 2TV>에 출연해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보드카, 위스키, 맥주를 마시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용기있는 발언을 했다. 뷔젱 장관은 “프랑스 국민들이 포도주는 다른 술과 달리 효용성을 가진 수호자라고 믿고 있는데 이는 과학적으로 거짓이다. 포도주는 다른 술과 같은 알코올이다”라고 덧붙였다.
 
뷔젱 장관은 공중보건보다 알코올 산업에 더욱 민감함을 보이며 과학적 증거를 부정하는 마크롱 정부에서 진실을 말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이에 대해 크리스토프 카스타네르(Christophe Castaner) 프랑스 정부 대변인은 베에프엠(BFM) TV에 출연해 “포도주에 알코올이 들어있지만 강하지 않다…포도주는 우리 문화·전통의 일부이고, 우리 국민의 아이덴티티다. 포도주는 우리의 적이 아니다”라고 뷔젱 장관을 반박했다.
 
와인을 둘러싼 진실게임을 보면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포도주가 건강에 좋다는 것은 포도주 생산자들이 만든 일종의 ‘프레임’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적포도주가 건강에 좋다’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자 한때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와인붐이 일었다. 그러나 최근 프랑스에서 벌어진 ‘와인 진실게임’이 말해주듯 와인도 결국 술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도 와인은 물론 술 전반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해야만 할 때다.
 
세계에서 술을 가장 많이 마시는 나라 한국. 알코올로 인해 매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간암으로 죽어가고 있는지 밝히고 술이 국민 건강에 미치는 유해성을 홍보해야만 한다. 술도 담배와 마찬가지로 국민 건강을 해치는 주요 원인이다. 담배만 규제할 것이 아니라 술에 대한 캠페인과 규제도 강화해야 한다. 문재인정부는 이 점을 인식하고 ‘술에 대한 국가적 플랜’을 제시할 수 있길 바란다.
 
최인숙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프랑스 정치현상을 잣대로 한국의 정치현실 개선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책 ‘빠리정치 서울정치(매경출판)’를 펴냈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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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