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방안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17일 공청회를 통해 제시한 도입방안에 따르면 올해 안에 주주대표 소송 근거를 마련하는 등 사전정지 작업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이어 내년에는 기업의 부당지원행위와 경영진 일가의 사익 편취행위, 과도한 임원보수 한도 등 주주가치와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중점관리사안’으로 주주권행사 범위를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또 문제있는 기업에 대해서는 이사회와 경영진 면담을 통해 개선대책을 요구하는 등 비공개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과도한 영향력 행사'라는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국민연금 자금을 받아 위탁운용하는 자산운용사에 의결권을 줄 계획이라고 한다.
국민연금이 지난해 말 현재 투자한 주식은 130조원을 넘는다. 지분이 10% 넘는 기업은 지난 19일 현재 106개에 이른다. 아마도 이 가운데 상당수는 오너 일가의 지분보다 많을 것이다. 국민이 낸 쌈짓돈으로 재벌의 경영권을 사실상 지켜주고 있는 셈이다. 최근 갑질논란을 일으킨 한진그룹의 대한항공 지분도 국민연금이 11.5%를 보유하고 있다.
이런 정도의 지분율을 보유하고 있으면 투자대상 기업이 기업가치 하락을 초래할 만한 짓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을 책임이 국민연금에 있다. 노후를 위해 조금씩 기금을 갹출해서 내는 노동자와 사업주의 기대에 부응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까지 국민연금은 이러한 책임을 망각해 왔다. 그저 ‘주총거수기’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그렇지만 더 이상 그런 거수기 노릇을 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 공감대를 얻고 있다.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하기로 한 것도 바로 이런 공감대에 따른 것이다. 그렇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절충’과 ‘타협’에 안주하려는 것 같다. 돌다리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두드려 보겠다는 것 아닌가.
이를테면 주주제안을 통한 사외이사 추천권 등 '경영참여'에 해당하는 활동을 “제반여건이 구비된 후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시장이나 기업에 충격 주지 않으려는 나름대로의 배려라고 여겨진다. 특히 ‘연금사회주의’라느니 지나친 경영간섭이라느니 하면서 거부감을 보여온 재계를 달래려는 뜻이 담겨 있는 듯하다.
일리 있다고 생각된다. 이 세상의 무슨 일이든 일거에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일부를 유보하거나 늦추는 것을 무조건 나무랄 필요는 없겠다.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 다른 것은 다소 늦추더라도 사외이사 추천은 반드시 도입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국민연금 공단이나 보건복지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최근 재벌 2~3세들의 사익편취행위와 갑질 등 온갖 추태가 연이어 드러났다. 경영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격형성도 되지 않은 2~3세들이 일탈행위를 저지르다가 큰 충격을 주곤 했다. 직원들에게 모멸감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기업경영도 어렵게 만든다. 아시아나항공은 기내식대란에 이어 요즘 정비불량으로 연일 운항차질을 빚고 있다. 언제 더 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사실 조마조마하다.
재벌가의 일탈행동은 기업가치까지 떨어뜨리기 일쑤다. 이들 기업의 주식을 들고 있다가 손실을 입은 사례가 얼마나 많았던가. 최근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사건을 보고 두 항공사의 오너를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주장도 거세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이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니 그것은 쉽지 않다. 오너의 지분을 빼앗을 수도 없다.
그 대신 최소한 이들 총수의 무책임한 전횡과 일탈이라도 사외이사들이 견제해 줄 필요가 있지만, 지금까지 사외이사들은 주어진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올해 주주총회에서 선임된 사외이사들 상당수가 총수나 해당 기업과 직간접적인 인연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로 채워졌다. 말하자면 ‘고무도장’만 가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유능하고 올곧은 사외이사를 국민연금이 추천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그것이 정부가 재벌에 대한 직접 규제를 삼가면서도 재벌총수의 일탈을 막고 합리적 경영풍토를 정착시킬 유력한 방안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이번에 공개된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 시행방안은 이런 기대와 시대적 요구를 모두 역행하는 것이다. 노조추천 이사제가 대안이 될 만하지만 이 역시 재계와 금융위원회가 마다하고 있다. 재벌의 환호성이 벌써 들리는 듯하다. 국민연금은 이런 환호성을 언제까지 듣고만 있을 것인가.
차기태 언론인 (folium@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