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사법부 시절 박근혜정부와 ‘재판거래’를 시도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일부 사건의 재판을 정권의 입맛에 맞게 판결하려 했다는 의혹이다.
사법부 자체조사 결과 거래대상 사건 가운데는 KTX 여승무원 해고 사건도 있었다. 코레일이 KTX 여승무원들을 해고한 것이 정당하다는 2015년의 대법원 판결을 가리킨다. 정확한 진실은 아직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법원 판결이 부당했다고 외쳐온 여승무원들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정황증거라 할 수 있다.
오랜 기다림과 투쟁에 지쳐 있던 그녀들에게는 분노를 불러오는, 그러면서도 희망을 주는 희소식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엘렉트라가 동생 오레스테스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새로운 힘을 주고 있다. 올해로 해고 13년째를 맞은 KTX의 그녀들은 새로이 용기를 얻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다.
김승하 KTX열차승무지부 지부장 등 해고 승무원들은 29일 대법원 법정까지 찾아간 데 이어 30일 김환수 대법원장 비서실장을 면담했다. 이들은 김 비서실장을 만나 기존의 판결에 대해 "직권재심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난항 끝에 "대법원장께 정확하게 전달하겠다"는 입장만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들은 이달 1일 오영식 한국철도공사 사장을 만나 조속한 복직을 촉구했고, 4일에는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문재인 대통령께 드리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정규직으로 복직해야 한다고 했던 1심과 2심 판결을 코레일이 수용하고, 다시 KTX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8일에는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을 만나러 세종시로 달려갔다.
김 장관은 지난해 12월29일 KTX 해고 여승무원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을 만나 조속한 문제 해결을 약속한 바 있다. 여승무원들은 과거 정권과 달리 문재인정부는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으로 믿고, 기대하고, 기다려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무 응답도 없으니 얼마나 애가 탈까. 그야말로 ‘희망고문’이다.
KTX는 흔히 국내선 항공편과 비교된다. 장거리 국내여행을 하는데 가장 빠르고 편리한 교통편이라는 점에서 서로 경쟁관계에 있다. 그런데 항공기 여승무원은 모두 정식 사원이다. 항공기 승객을 쾌적하고 안전하게 실어나르는 데는 조종사 못지않게 이들 승무원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KTX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KTX 여승무원들도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상식은 애써 외면당해 왔다. 노무현정부 당시 이들을 해고할 때 그랬고, 대법원 판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법과 행정이 인간사회의 상식을 거듭 거스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쫓겨난 하갈처럼 이들도 억울하게 해고돼 아직까지 떠돌고 있다.
그런 상식 위반 상태를 시정할 기회가 이제 다시 찾아왔다. 절호의 기회가 왔으니 해고 승무원들은 앞으로 더 활발하게 움직일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정부나 코레일 등이 과연 언제까지 이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줄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태도가 혹시 바뀌어, 귀찮아 하지나 않을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들 여승무원이 지난 1일 오후 오영식 한국철도공사 사장을 면담하기에 앞서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사측에서 면담 내용 비공개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면담도 예정된 시간보다 30분 늦게 실현됐다. 이런 일이 앞으로는 벌어지지 않는다고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마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세월호 유가족을 냉대했듯이, 지금 정부와 코레일도 혹시 귀를 막고 이들 승무원을 차갑게 대하지 않을까.
이런 걱정은 기우라고 치자. 그렇다면 그런 기우를 근원적으로 해소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물론 이들을 조속히 복직시키는 것이다. 사실 KTX 여승무원들이 대법원에 요구한 직권재심이 받아들여질지는 확실하지 않다.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최종판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나아가 재심에서 판결이 바뀐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때문에 정부와 코레일이 사법부에 공을 넘기지 말고 신속한 결단을 내리는 것이 가장 간명하다. 김현미 장관과 오영식 사장이 조금만 성의를 가지면 되지 않을까 한다. 약간의 성의로 수백명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과거 민주화운동을 하고 정의를 부르짖던 이들에게 이보다 더 시급한 현안이 또 있을까. 권한이 있을 때 권한을 올바르게 행사하는 것이 정의의 지름길이다.
차기태(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