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남북, '기적같은 기회' 말로 그르쳐서야

입력 : 2018-11-03 오후 2:30:00
최한영 정경부 기자
잘나가던 개인이 말 한마디로 일을 그르치는 경우는 숱하게 많다. 2004년 17대 총선 당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현 민주평화당 대표)의 “60대 이상은 투표를 안해도 괜찮다”는 발언은 이른바 ‘노인 폄하’로 확대·재생산되며 역풍을 불러일으켰다. 결과적으로 열린우리당이 299석 중 152석을 얻었지만, 정 의장의 발언이 아니었다면 더 많은 의석을 가져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당 내에 남았다. 1973년 군 내 실력자 중 하나였던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육군 소장)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한 “각하(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는 형님”이라는 말 한마디로 고초를 겪고 결국 군복까지 벗었다.
 
남북관계에서도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1994년 3월19일, 판문점 우리 측 평화의집에서 특사교환 8차 실무접촉이 열렸다. 북미 양국이 어느 정도 접점을 찾고 있던 것과 달리 남북은 김영삼 대통령의 ‘고집’으로 헤매던 때였다. 우리 측 송영대 대표가 “귀측 핵문제가 조속히 해결되지 않을 경우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예측할 수 없다”고 말하자 북측 박영수 대표는 “우리는 전쟁을 바라지 않지만 결코 그쪽이 전쟁을 강요하는데 대해서는 피할 생각이 없다.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만다”고 맞받았다. 전체 54분의 회담내용 중 ‘서울 불바다’를 포함해 가장 자극적인 2분40초 분량의 테이프가 방송사에 건네졌고, 방송사는 다시 1분 분량을 추려 보도했다. 박 대표의 한 마디가 기폭제가 돼 북미 합의는 무위로 돌아갔고, 그해 6월 우리가 모르는 사이 한반도는 전쟁위기로까지 빠져든다.
 
서로의 불신·긴장을 해소하고 신뢰를 쌓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이를 무너뜨리는 것은 말 한 마디로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예다.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문제를 “유리그릇 다루듯이 하라”고 말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평양정상회담 이틀째인 지난 달 19일,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에 동행했던 우리 측 기업인들에게 리선권 북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는 말을 했는지를 놓고 진위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냉면 발언까지는 아니더라도 리 위원장의 평소 성향을 봤을 때 우리 기업인들에게 무례한 언행을 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반면 정부·여당 측에서는 “확인 중”이라거나 “해당 발언이 없었다”며 수습하고 있다.
 
리 위원장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애써 여기까지 끌고온 남북관계를 수렁에 빠뜨릴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을 한 것이다. 반대로 이같은 발언이 없었다면, 문제제기를 한 자유한국당이 사실을 왜곡하며 정치공세에 나선 것이기에 비난받아 마땅하다. 누가 됐든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는 책임을 져야한다. 문 대통령 말대로 지금의 한반도 정세가 “기적같이 찾아온 기회”이기에, 말 한 마디의 힘이 너무도 크기에, 향후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아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
 
최한영 정경부 기자(visionch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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