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한 해가 흘러가고 새해가 밝았다. 지난해 한국 경제는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를 돌파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출도 사상 처음으로 6000억달러를 넘어섰다. 한국의 경제발전사에서 또하나의 기념비를 세운 해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당면한 현실의 무게가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경제성장률은 다시 2%대로 하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2017년 3.1%로 올라가 저성장의 늪에서 빠져나오는가 싶더니 1년만에 주저앉았다.
한국경제가 직면한 저성장 늪은 사실 제법 오래됐다. 2011년 3.7% 성장에서 이듬해 2.3%로 떨어진 이후 어려움의 연속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누릴 사람은 충분히 누리고 있다. 이를테면 연간 억대연봉을 받는 근로자가 2013년 47만2000명에서 2017년에는 71만9000명으로 52% 증가했다. 이 기간중 1인당 국민소득 증가율 14%의 3배에 이른다. 2017년에는 5억원 이상의 금융소득자도 전년보다 25.3% 증가했다. 저금리 기조가 계속된 가운데서도 이자나 배당 소득만으로 5억원 이상 번 사람들이 큰 폭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반면 일반 국민의 경제적 어려움은 별로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을 내걸고 국민의 가처분소득 증대와 각종 비용부담 감소를 추진해 왔다. 그렇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성과는 아직 미약하다.
이렇게 볼 때 최저임금을 다소 큰 폭으로 올린 것은 결코 무리는 아니라고 여겨진다. 한국만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스페인, 멕시코, 뉴질랜드,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대폭 올렸거나 올릴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2년 사이 30% 가까이 대폭 인상함으로써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다. 주 52시간 근로제까지 서둘러 도입돼 충격을 더했다. 특히 영세사업자들의 아우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급격하게 시행됐기 때문이다.
이같은 조급증은 한국 산업의 엄중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사실 지난해 심각하게 대두된 고용문제는 상당부분 주력산업의 경쟁력 저하와 업황 악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자동차와 조선 등 한국의 고용과 성장을 이끌어온 제조업이 탁월한 경쟁력을 유지하고 가동상태도 양호했다면 어땠을까?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의 충격을 무난히 소화하고 부작용도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았을 듯하다.
그러나 정부는 이처럼 어려운 제조업의 어려운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일자리 대책이라며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고, 혁신성장을 추진하겠다고 요란하게 외치기만 했다. 그러나 혁신성장도 대부분 말 뿐이었다.
정부는 지난해 하반기 들어서야 문제의 실체를 알아차렸다. 마치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을 뒤늦게 깨달았듯이 한국 정부도 엄중한 상황을 뒤늦게 인지했다. 정부는 그래서 연말을 앞두고 자동차와 조선 산업의 회생 대책을 서둘러 내놓았다. 경제활력 회복방안도 부랴부랴 발표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달 26일 열린 국민경제자문회의에 참석해 "우리 전통 주력 제조산업을 혁신해 고도화하고 경쟁력을 높이는 것은 대단히 절실한 과제"라고 말했다.
늦기는 했지만, 더 늦기 전에 알아차렸으니 다행이라고 하겠다. 이제부터 신발끈을 고쳐 매면 된다. 잘만 하면 회생할 잠재력도 작지 않다. 사실 한국 산업과 경제가 지금 매우 어렵기는 하지만 침몰 위기는 아니다. 경제의 중심이 특정 산업에 쏠린 것도 아니다. 화장품, 바이오, 한류산업 등 새로이 무럭무럭 크는 산업도 적지 않다. 기업의 체력도 과거에 비해 상당히 강해졌다. 하나금융투자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기업의 이익 성장률에 대한 기대가 많이 꺾이긴 했지만, 펀더멘털은 견고하다. 이에 따라 신용등급을 특별히 올리거나 내려야 할 기업도 상당히 줄었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가 오랜 동안 저성장의 늪에 빠져있는 동안 기업들이 맷집강화에 힘썼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웬만한 충격에는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체력은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럴 때 정부와 업계, 노동자들이 지혜를 모으면 다시 탄력을 받을 수 있다. 지혜를 모은다는 것은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올바른 인식이 있어야 올바른 대책이 나오는 법이다.
새해에도 한국 경제에는 많은 시련과 도전이 닥칠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 등 해외여건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렇지만 문제의 핵심만 정확하게 알고 대응하면 무난히 헤쳐나갈 수 있다. 진실로 한국 산업과 경제가 다시 도약하는 실마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차기태 언론인(folium@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