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광연 기자] 김선국(사법연수원 23기) 변호사는 한 살 때 사고로 오른쪽 팔을 잃은 뒤 그간 우리 사회 장애인에 대한 멸시와 동정 어린 시선에 맞서왔다. 우리 나이로 환갑이 된 김 변호사는 이제 이러한 눈들도 가슴에 품을 만큼 성숙해졌다. 항상 웃으며 긍정적으로 살다 보니 얼굴마저도 이전과 달리 밝게 변했다고 웃는 그는 장애인을 향한 불편한 시각에 맞서 당당히 중견 법조인으로 성장했다. 법조인이 된 뒤 사회적 약자를 위한 활동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김 변호사를 지난달 22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나 그간 뚝심 있게 살아온 삶에 대해 들었다. (편집자주)
김선국 변호사가 지난달 23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사진/김광연 기자
어린 시절 상처가 컸겠다.
어렸을 때 길을 지나가는데 "외팔이"라고 놀리면 많이 싸웠다. 그때만 해도 측은·동정까지는 괜찮은데 무시했다. 중학생 때 어른 중에서도 인격적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제 잘못도 아닌데 "외팔이 XX"라고 하면서 막말하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은 장애인에 대한 시선이 조금 달라졌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 시각에서 보면 너무 웃기는데 제가 10가지 중 1~2가지 실수하면 팔 가지고 야단치는 사람이 있었고 그중 하다못해 학교 선생님까지도 그랬다. 당시 우리 사회는 장애인에게 편견 있는 세상이었고 그 시기가 흐른 뒤 지금 사람들은 함께 사는 세상이라고 생각해 많이 배려한다.
고등학생 때 많이 방황했다고 들었다.
중학생 때 반에서 1등 한 적도 있고 공부를 꽤 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고등학교를 제때 못 올라가고 1년 늦게 입학했다. 지금 같으면 장학금 있는 학교에 갔을 텐데 그때는 시스템 자체를 잘 알지 못했다. 네 형제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힘이 드니까 형 고등학교 3학년 실습 때 돈이 조금 나오면 그때 가라고 했다. 공부가 하고 싶었는데 고등학교에 못 간 것이고 막상 고등학교에 갔을 때도 1년이 늦었다는 게 컸다. 제 중학교 동창들이 한 학년 선배가 된 상황이라 처음에는 고교 동급생들과도 잘 못 어울렸다. 팔도 다친 데다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1년을 꿇었으니 속에서 뭔가 분노 같은 '누구라도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질풍노도의 시기인 사춘기 때 그럴 수 있지 않나.
학창시절 크게 싸운 적이 있었나.
고등학교 1학년 때 싸우면서 친구 이를 부러뜨렸다. 그 친구가 그때 부모님이나 경찰을 불렀으면 제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는데 그렇지 않아 고맙다. 지금은 그 친구랑 굉장히 친한데 지금도 변론할 때나 시보 생활할 때 어린아이들이 사고 친 사건을 보면 한 번만 봐달라는 가치관이 생겼다. 어렸을 때 철없이 한 행동을 가지고 바로 처벌받으면 좀 그렇지 않나. 저도 그때 경찰서 가서 처벌받았다면 인생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대학 들어간 이후에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그 친구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내가 너에게 철부지같이 굴었던 거 같다. 네가 육사에 못 가면 네 인생이 바뀔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잘 다니고 나도 법대에 잘 다니고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들이 있기는 했지만, 제가 1년 꿇은 것을 아니까 함부로 하지 않았고 저도 살갑게 하지 못해서 그 부분은 조금 아쉽다.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친한 벗을 많이 남길 기회 아닌가. 그래도 지금 친한 친구들도 있고 고등학교 총동문회 수석부회장을 하면서 친구들과 잘 지낸다. 1년 선배는 선배로 대우한다. (웃음)
아직 사회는 신체장애를 동정 대상으로 본다.
처음에는 많이 불편했는데 이제 우리 나이로 환갑이 되니까 사람들이 저를 측은하고 동정 어리게 보는 시각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보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거다. 저를 동정 어리게 안 봐줬으면 하는 생각도 있지만, 그 사람들은 저를 보며 '팔이 하나 없으니까 좀 더 많이 힘들겠구나'라는 생각으로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한다든지 할 수 있다. 젊은 사람 중에 제가 오른팔 없이 지하철에 서 있으면 머리가 하얗고 팔이 없으니 자리를 양보하는데 그 사람 나름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좋은 일을 한 거다. 다른 사람이 저를 있는 그대로 보는 시각이 '외팔이', '몸이 불편한 사람'인 것이고 몸이 불편한 사람을 보고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건데 그러한 시각으로 보지 말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 이제는 이렇게 됐다.
모 중학교 폭력대책위원회에서 활동 중인 김 변호사가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하고 있다. 사진/김선국 변호사
법조인을 꿈꾼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학원도 제대로 다닌 적이 없고 참고서도 제대로 사지 못했지만 스스로 공부를 잘하고 싶었다. 법을 공부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사회에서 인정해주고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법률적 지식을 가지는 것이니 고등학생 때부터 법대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몸이 불편하니까 몸이 불편한 사람을 돕겠다고 꼭 집어서 생각한 것은 아니고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려는 마음은 품고 있었다.
국선변호인·조정위원으로 오래 활동했다.
지금은 풀이 있어 국선 변호를 하지는 않지만, 변호사 초기 때부터 국선 변호를 열심히 해 법원으로부터 표창장도 받았다. 돈이 있는 사람은 사선 변호사를 선임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국선변호사를 선임할 수밖에 없다. 많을 때는 하루 5건씩 하고 그랬는데 당시 어떤 재판장이 왜 이렇게 많이 하느냐고 물어보기도 했었다. 또 적을 때는 가뭄에 콩 나듯이 하기도 하고 꾸준히 하려고 했고 법원 조정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현재 모 중학교 폭력대책위원회 위원으로도 10년 넘게 활동하고 있다. 대책위에 나가면 사고 친 가해자 학생·가족, 피해자 학생·가족 등이 나와 진술 등을 한다. 요즘은 예전과 달라서 얘들이 너무 쉽게 나쁜 짓을 하는데 가해 학생들에게 야단도 치고 위원들에게도 웬만하면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는 식으로 많이 말한다. 특히 '너 때문에 어머니가 여기 오지 않았느냐. 왜 이런 일 때문에 어머니가 같이 눈물을 흘려야 되나'라고 타이르기도 하고 되도록 선도한다. 대책위원 여러 명 중 한 명이라 제 의도만으로 결론이 흘러갈 수 없지만 기회가 되면 항상 그렇게 하려고 한다.
비슷한 고민을 가진 후배들에게 한 말씀.
장애가 있어도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며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 저도 동호회에 나가면 축구화를 스스로 맬 수 없어 주변 사람들이 도와주는 데 고맙게 생각한다. 또 남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대학 때 복학생 선배가 자기는 취직이 안 돼 죽겠는데 넌 왜 항상 웃냐고 한 적이 있었다.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는 게 좋고 막상 부딪치면 안 될 것 같아도 해결된다. 옛날에는 인상 쓰고 그랬는데 지금은 보기 좋은 얼굴이 됐다. 제 친구 아들이 저를 보고 자기 아버지 친구뻘 되는 사람 중에 저렇게 욕심 없이 생긴 사람은 처음 봤다고 그러더라. (웃음)
앞으로 꿈이 있다면.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사람들과 더불어서 살고, 도울 일이 있으면 돕는 게 새해 다짐이다. 제가 큰 힘이 어디 있고 세상을 어떻게 한꺼번에 바꾸겠나. 하지만 조그마한 일이라도 할 때 이를 본 사람 중에 한두 명이라도 '보기 좋다'라고 말해주면 좋은 거다. 더불어 봉사하고 친교를 열심히 하는 한해를 소망한다. 작은 불꽃 하나가 세상을 바꾸는 것 아니겠나.
김광연 기자 fun3503@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