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서윤 기자] 교통사고를 낸 뒤 차에서 내리지 않고 구두로만 피해자 상태를 확인한 뒤 그대로 사고현장을 떠났더라도, 사고가 매우 경미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라면 뺑소니로 볼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특정범죄가중법 위반(도주치상) 혐의로 기소된 김모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김씨의 유죄를 일부 인정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춘천지법 강릉지원으로 되돌려 보냈다고 15일 밝혔다.
재판부는 “법이 정한 ‘피해자를 구호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도주한 때’란, 사고 운전자가 피해자가 사상을 당한 사실을 인식했음에도 피해자 구호 의무를 이행하기 전에 사고현장을 이탈해 사고를 낸 자가 누구인지 확정될 수 없는 상태를 초래하는 경우를 말한다”고 전제했다. 또 "도주의 ‘범의’로써 사고현장을 이탈했는지를 판정할 때는 사고의 경위와 내용, 상해 부위와 정도, 운전자의 과실 정도, 사고 후 정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사고 당시 피고인은 피해자로부터 괜찮다는 말을 듣고 비교적 경미한 사고라고 판단해 사고 장소를 이탈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피고인이 도주의 범의로써 사고현장을 이탈해 사고를 낸 자가 누구인지 확정할 수 없는 상태를 초래한 것으로 단정하긴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와는 다른 취지로 인적사항을 남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피고인에게 도주의 범의가 있다고 보고 유죄를 선고한 원심은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청사의 모습. 사진/뉴시스
법원에 따르면, 김씨는 태백 전통시장 앞 도로를 지나다 보행 중이던 A씨의 팔을 들이받고는 조수석 창문을 열어 대화한 뒤 현장을 벗어났고, A씨도 생선 한 마리를 구입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저녁부터 팔이 아파진 A씨는 안면이 있던 김씨가 아무런 안부전화도 없자 화가 났고, 이후 차량번호를 콜택시 회사에 조회해 김씨에게 연락했다. A씨와 김씨는 합의를 시도하다 사고 발생 5일 만에 경찰서를 찾아 뺑소니 여부를 다투는 등 갈등이 심화했고, 결국 A씨는 김씨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1심은 김씨가 별다른 조치 없이 현장을 이탈한 사실은 인정했지만, 사고 경위와 내용 및 사고 후 정황, A씨가 김씨와 말다툼 중 ‘지금은 악이 나서 뺑소니로 신고할 것’이라고 말한 점 등을 참작해 공소를 기각했다.
2심은 “피해자가 괜찮다는 말을 했다 하더라도 상해의 발생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피고인을 특정하는 것이 용이할 뿐 인적사항을 알려주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고 볼 수 없는데, 피고인이 인적사항을 알리지 않고 현장을 떠남으로써 사고를 낸 사람이 누구인지 확정될 수 없는 상태를 초래했다”면서 일부 유죄를 인정하고, 벌금 250만원형에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최서윤 기자 sabiduria@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