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4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이 있던 날, 그는 프랑스 파리에 있었다. 앵콜 요청에 뽑아 든 곡도 운명처럼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였다. 아버지를 위하여 기도하는 소녀 엘렌을 그린 곡. 운명처럼 그날 그 공연장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한 시간이 됐다.
추모의 상념과 시간들은 곧 자신의 곁을 지키던 어머니에게로 가 닿았다. 연세가 많아 이제는 치매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 자식이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길 바라며 평생을 바쳐 온 어머니…."이제는 국제전화를 해도 제 목소리를 잘 모르세요. 점점 (거리가)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그 분을 위한 음반을 들려드려야 겠다 생각했어요."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성악가로 활동하는 조수미. 그가 어머니에 대한 테마로 작업한 새 앨범 '마더'를 냈다. 어머니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특별하고 애틋한 마음, 현대인들의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곡들이 담겼다. 23일 서울 강남구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제 어머니는 평생 본인의 꿈을 희생하시고 사셨다"며 "자식을 위해 사셨던 대한민국 모든 어머니들의 큰 사랑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작업 소감을 얘기했다.
조수미. 사진/PRM
어머니는 조수미가 현재의 인생을 사는 데 절대적 영향을 준 존재다. 학창시절 수의사가 되길 바랐던 그는 어머니를 통해 성악과 피아노를 접하기 시작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본인이 성악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굉장히 원망하면서 사셨어요. 그래서 저한테도 하루 두 세번씩 '세계를 돌며 노래해야 한다'는 말씀을 꼭 하곤 하셨죠. 피아노 연습을 하지 않으면 8시간 문도 열어주지 않으셨고 대단한 성악가가 되려면 결혼도 말라 하셨는데, 그게 어린 마음에 원망스럽고 미울 때도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저녁 그는 설거지를 하던 어머니를 바라봤다. 혼자말로 노래하고 얘기하는 어머니의 뒷 모습이 어쩐지 초라하고 슬퍼보였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어머니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꿈의 물길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때만 해도 딸에게 그렇게 큰 책임을 지우시려나 하고 이해를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은 어머니가 저를 잘 보신 거죠. 성악에 대한 재능이 있어서 그렇게 하셨던 것 같아요. 그후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서 작은 셋방에 살며 굶으며 음악할 때도 늘 어머니가 생각났어요. 원하시는 꿈을 제가 만들어 드리고 싶었어요. 알고 보면 제가 효녀에요."
이제 나이가 든 어머니는 점점 그를 잊어간다. 아버지가 떠난 후 '어머니 마저 떠난다면' 이란 생각에 미치자 그와 함께 부르던 노래들을 다시 꺼내보고 싶었다. 클래식을 넘어 영화 OST와 아일랜드·폴란드 민요 등 장르를 떠나 '어머니 품처럼 따뜻하게 들을 수 있는 곡들'을 조수미가 직접 추려 한 앨범에 담았다. 드보르작의 'Songs My Mother Taught Me(어머니가 가르쳐 주신노래)'는 그의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셨던 곡이다.
"모든 곡들은 저의 어머니께서 좋아하시고 저와 함께 불렀던 노래들입니다. 이제는 저를 못알아보셔서 대화조차 나눌 수 없지만 이 앨범을 들려드리고 싶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손을 잡고 다독여드리는 그 정도 밖엔 안될 것 같지만요…"
조수미. 사진/PRM
어머니에 대한 주제이긴 하나 앨범은 상징적인 큰 사랑까지 범위를 확장한다.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게 들을 수 있는 그런 음반이 되길 원했어요. 그래서 인간적인 유대관계 뿐 아니라 저희 조국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요. 주위 모든 이들이 큰 사랑을 베풀며 살면 좋겠다는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
보너스 트랙으로 실린 곡 '아임 어 코리안(I'm a Korean)'은 세계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 대한 애정과 사랑으로 부른 곡이다. 윤일상이 작사·작곡자로 참여한 곡은 지난 2월28일 삼일절 백주년 전야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됐었다. 조수미는 "세계를 무대로 돌며 해외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교민들, 열심히 사시는 분들과 만나왔다"며 "그분들에게 함께 하자는, 같이 손을 잡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며 곡을 소개했다.
페데리코 파치오티. 사진/PRM
이날 간담회에는 이탈리아 뮤지션 페데리코 파치오티도 참여했다. 그는 조수미의 평창 패럴림픽 주제가였던 '히어 애즈 원(Here as one)' 작곡자로, 이번 앨범의 11번 트랙 '이터널 러브(Eternal Love)'에도 참여했다. 록 밴드 기타리스트로 음악을 시작했지만 성악과 작곡 등 음악적 스펙트럼이 넓다.
조수미는 "유학할 때 만난 후배"라고 그를 소개하며 "미래에는 젊은 뮤지션들이 새로운 컬러로 음악적인 표현을 하지 않을까 싶다. 페데리코는 그런 점에서 제가 생각하는 미래성 퍼포머에 가장 맞는 뮤지션이라 생각했다"고 이번 협업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페데리코는 "조수미와의 작업, 앞으로 하게 될 공연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화답했다. 또 곡 'Here as one'에 대해선 "당시 곡을 썼던 시기엔 남한과 북한이 굉장히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기"라며 "제가 원하는 건 남북이 평화적으로 함께 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메시지를 담은 곡이 관심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고 설명했다.
이번 앨범에는 이 외에도 최영선 지휘의 프라임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강은일(해금), 송영주(재즈 피아노), 김인집(기타), 신동진(드럼) 등 최고의 아티스트들이 함께 했다. 듀엣곡 'Fiore(꽃)'에는 팝페라 테너 알렉산드로 사피나도 참여했다.
오는 5월8일까지 '세상 모든 어머니를 노래한다'는 테마로 국내 7개 도시를 도는 투어 '마더디어(Mother Dear)'를 진행한다. 용인에서 시작한 공연은 강릉, 대구, 창원, 제주, 부산, 여수를 돌고 롯데콘서트홀에서 마무리가 된다.
조수미. 사진/PRM
이후로는 세계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간다. 아부다비 '스페셜 올림픽'에서 발달 장애 아티스트와 함께 하는 공연을 비롯해 일본 오사카와 카자흐스탄, 잘츠부르크에서 열리는 콘서트가 예정돼 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오페라를 해서 제 이름을 알리는 공연을 꿈꿨어요. 그러다가 제 이름을 건 투어를 할 수 있었고요. 이제는 제가 꿈꿔오던 젊은이나 장애인을 위한 사회 활동도 조금씩 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대한민국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고, 지금부터가 시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의 프리마돈나가 되기 까지 젊은 나이로 여러 국제 무대에 서 왔다. 서른 살 전 까지 세계 5대 오페라 극장 주연, 동양인 최초 국제 6개 콩쿠르 석권, 동양인 최초 황금기러기상(최고의 소프라노), 동양인 최초 그래미상(클래식부문), 국제 푸치니상 등에서 수상을 했다. 이날 현재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젊은 후배 뮤지션들에 대한 소감도 전했다.
그는 "젊은 이들이 국가 간의 커넥션이 돼 주고 있어서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다만 우린 한국인이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져가야 한다. 우리 고유의 것을 다른 정서와 함께 상징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또 "전 세계 콩쿠르에서 상을 받고 활동하는 '케이 클래식' 뮤지션들도 상당히 많다"며 "아티스트 한 분, 한 분의 매니지먼트 방식에 집중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을 더 반짝일 수 있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클래식 외의 장르엔 앞으로도 도전할 계획이다. "고등학교 때는 팝을 좋아했고요. 클래식 외의 다른 음악이 감동을 주지 못한다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사랑해주는 팬들이 있는 곳도 없고요. 음악에 대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에요. 그리고 무대에서 모든 것을 뿜어내는 것, 그게 바로 제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단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